"믿음은 그저 믿는 것이다. 이해되거나 설명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큰 사고라고 할만한 것이 없을 것만 같은 시골마을 '곡성'에서 의문의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이 연쇄사건은 마을을 발칵 뒤집어 버리고 저마다 범인이 누구인지 다음 희생은 누구의 차례일지 두려움은 마을 사람들 사이에 깊게 파고들고 만다. 가해자는 모두 알 수 없는 두드러기 포진과 광기 어린 살기로 무차별하게 주변 인물을 도륙하는데 수사기관에서는 그 이유를 독버섯 중독으로 결론짓고 수사를 갈무리하려 한다. 그 무렵 나타난 수상한 일본 노인(쿠니무라 준)이 소문이 소문으로 유력한 범인으로 주목이 되고, 시골 경찰 '종구'(곽도원)는 목격을 했다는 묘한 여인 '무명'(천우희)을 만나면서 그를 범인으로 확신하게 된다. 그 무렵 비슷한 이상 증세를 보이는 딸 '효진'(김환희)은 점점 심각한 상황이 된다. '종구'는 아버지로서 딸의 치유와 경찰로서 범인의 축출이라는 당면한 일들을 해결하기 위해 용하다는 무당 '일광'(황정민)에게 살굿을 요청하게 되는데...
살굿은 딸 '효진'에게 들어온 귀신을 쫓아 내게 될까? 아니면 감지할 수 없는 부정으로 역살을 맞게 될까? 작은 시골 마을 곡성에 가득 찬 '곡성(哭聲: The Wailing)'은 잦아들게 될까?
불편한 영화 '곡성'
배우 하정우의 먹방 연기로 한때 회자되었던 '황해(2010)' 이후 6년 만에 나홍진 감독의 영화 '곡성'을 보았다. 영화 '곡성'은 여러모로 참 불편한 영화임에 틀림없었다. 시작 장면부터 깊은 사투리로 그리 정겹지 않은 욕지거리하는 장모의 밥상부터 불편한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피칠갑한 살인 도륙 현장을 여과 없이 보여 주고 매 순간 미간을 찌푸리게 만드는 하드고어 표현들은 영화 상영 내내 불편하게 만든다. 영화 속에 항상 표현되는 음습한 마을의 분위기가 그 긴 러닝타임을 꽉 채우고 있는 것도 불편하기 끝이 없다. 그뿐 아니라 스릴러 하드보일드처럼 시작한 영화는 진행되면서 점점 오컬트 장르로, 때로는 좀비 영화로 가끔은 아포칼립스 주제를 보여 주다가 이따금 뜬금없는 유머 코드가 곳곳에 들어 있다. 장르적 널뛰기와 융합은 멀미 감 마저 들게 만들어 불편하다. 그러나 가장 불편한 것은 어지럼증을 유발하는 이러한 혼돈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그대로 보여 준다는 점일 것이다. 현실인지 꿈인지, 사실인지 영화적 이야기인지, 미친 것인지 정상인 것인지, 신인지 악마인지 헷갈리기 시작하면서 생각은 온통 혼동에 빠져 버린다. 이 구분의 모호함이야 말로 혼동된 이 세상에 대한 가장 적절한 표현이기에 영화는 시종일관 불편함을 가져다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불편한 영화를 보는 내내 앞자리 여고생 두 명은 겉옷을 올려 눈을 가리기 일쑤였고, 짧은 상고머리에 군복으로 보아 휴가 나온 해병임에 틀림없어 보이는 기골장대 한 옆자리 청년은 '헉'하며 어울리지 않은 신음을 쏟아 내고 있었다. 영화가 끝나면서 사람들 대부분은 더 불편한 마음을 감추기가 어렵다. "영화가 뭐 이래?"라는 투정부터 "한국 영화는 어려워."라는 성급한 일반화까지 들려오고, SNS나 블로그 곳곳에는 '영화 <곡성>의 완벽한 해석판' 따위의 포스팅이 눈에 띈다. 어느 누구도 "재미있어", "감동이야", 혹은 "영화 참 좋더라"라는 상투적인 칭찬은 찾아보기 어려운 영화임에는 틀림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곡성'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어벤저스 : 시빌 워'를 제치고 박스오피스 최상단을 유지하고 있다. 이 현상 또한 혼란스러운 결과가 아닌가 싶다. 그 혼란과 혼돈, 모호함과 규정할 수 없는 불편함들 자체가 이 영화 '곡성'을 보게 만드는 주된 이유가 될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무서운 영화의 서늘함을 안고 극장 밖으로 나온 봄날 같지 않게 뜨거운 세상은 더 불편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도 역시 매우 불편하였다. 영화를 보면서 장르적인 널뛰기로 인해 머리가 다소 복잡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영화를 이전 나홍진 형화처럼 현실주의에 기반한 미스터리 스릴러로 보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현세의 영역을 떠난 심령과 초자연에 맞닿은 오컬트로 보아야 하는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더 불편한 것은 영화를 보면서 생각보다 '뻔한' 이야기라는 확신이 들면서부터였다. 연쇄살인을 인간 영역 외의 무언가로 설명하려는 영화를 쫓아가다가 결국 '반전'을 제시하는 범죄 이야기 구조로 가겠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한 시간을 지나고서야 등장하는 무당 '일광'의 등장을 보면서 그 확신은 굳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신으로 생각되는 '살굿'의 장면에서 무당 '일광'과 미스터리 한 '일본 외지인'의 교차적인 대비 표현은 그 확신을 돌처럼 단단하게 만들었다. 서로 배틀이라도 하듯이 서로의 살을 쫓는 굿거리장단의 주고 받음은 물론, 흰 닭과 검은 닭으로 표현되는 제물 표현의 대비까지 영화는 점점 내게 악마가 아니라 악한 사람이 저지른 끔찍한 사건이라고 확신을 굳혀 주고 있었다. 아마도 그 무렵까지 결말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이용한 이해타산 적인 악인들의 끔찍한 범죄를 이야기하는 영화라고 생각하며 보고 있었다. 무당 '일광'이 기천만원 하는 살굿 등으로 이익을 취하기 위해 마을에 독버섯을 유통시키고, 그 화살을 외지인에게 돌리게 만들어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는 그런 이야기라 생각을 하며 보았다. 이전 영화나 사회적 사건에서도 '확증편향증'을 다루면서 사람들이 믿고 싶은 것만 믿기 때문에 진실을 바라보지 못함으로써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는 익숙한 구조를 약간 비틀어하는 뻔한 이야기라 생각이 들었다. 영화 첫 장면에서 루가복음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의 말씀을 프롤로그로 자막 띄우는 이유마저 뻔해 보였다. 하지만, 이야기가 정리될 것만 같은 시점에서부터 나의 확신은 꼬이기 시작하였다.
묘한 여인 '무명'의 등장은 이영화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는 않았다. 영화의 후반 부에 시골 경찰 '종구'와 어두운 시골 골목길에서 마주치기 전까지는 묘한 그녀의 정체조차 궁금하기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등장은 내가 영화를 보는 관점을 흔들어 놓았다. 무당 '일광'이 그녀를 '종구'의 집 앞에서 마주치자 각혈과 구토를 쏟아 내는 장면부터 혼돈이 시작되었다. 선인 아니면 악인, 신 아니면 사탄, 사람 아니면 귀신이라는 절대 이분적인 사고의 틀이 내 안에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무명'의 등장으로 이분적인 대결 구도는 무참히 깨져 버렸다. 누가 사람이고 누가 귀신일까, 누가 악인이고 누가 선인일까, 모든 사람은 선할까 아니면 모든 사람은 악할까... 결국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그 순간까지 혼돈의 멍함으로 자리를 쉽게 일어나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만 믿지만, 결국 믿음이란 설명되거나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사람의 믿음이란 좀처럼 존재할 수 없다는 것.
무서운 이야기, 더 무서운 이세상
나홍진 감독의 '곡성'을 영화 장르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포영화'라 이야기함에 있어서 큰 반론은 없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한국 극장가에서 전쟁영화, 흑인 영화와 스포츠 영화, 그리고 공포영화가 잘 안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속설이다. 다른 영화들은 많이 접하지 않아서 그 속설 증명이 어렵지만 공포영화는 그런 감이 없지 않다. 그것은 아마 공포영화가 단지 무서운 이야기만 담고 있다는 오해와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최근 오컬트 장르를 정면으로 내세운 김윤식, 강동원 주연의 '검은 사제들(2015)'은 5백5십만이라는 준수한 성적을 내긴 했지만, 그것은 주연배우의 티켓파워를 감안한다면 선전이라 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반면 오컬트 영화라 정면으로 이야기하지 않지만 결국은 오컬트적인 공포영화로 정리되는 '곡성'의 선전은 의외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공포영화가 그저 무서움을 전달하기보다는 왜 무서운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하기에 그저 '무서운 이야기'로 간주한다면 편견이 아닐까 싶다. 영화 안에서도 '종구'는 동료 경찰 '성복(손강국)'은 비 오는 음습한 날 최근 일어난 연쇄사건을 사람들 사이에 떠 도는 '무서운 이야기'로 치부하며 애써 두려움을 묻어 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무서운 공포영화는 그 시대의 광기를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오컬트 영화는 시대의 혼란과 혼돈을 역설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논리적으로 판단할 수 없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만연할 때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무엇으로 치부하기 마련이다.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생각이기도 하고 그 혼돈과 혼란에 아무 역할하지 못하는 자기 합리화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참담하고 끔찍한 일들을 제정신이 아닌 악령과 귀신이 하는 짓으로 얼버부리고 싶어서 이 극장으로 '무서운 이야기'를 보러 몰려드는지도 모르겠다.
최근 강남 한복판에서 꽃다운 나이의 여성이 이유도 없이 끔찍하게 죽음을 당했다. 범인이 여성혐오증이든 정신분열이든 사이코패스이든 좀처럼 이성적인 생각으로 설명되거나 이해할 수 없다. 인면수심의 형부는 나이 어린 처제를 지속적으로 성폭행하였고 그 결과로 나은 아이를 친모인 처제가 살해하는 일은 좀처럼 이야기로도 만들기 어렵다. 그것에 더해 자신에게 모욕감을 준다는 이유로 함께 동거하던 직장동료를 살해하고 상하반신을 분리해서 유기한 범인은 범행 후 태연하게 인생 10년 목표를 SNS에 포스팅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세상의 광기가 뉴스 사회면에 나오는 자극적인 사건 사고들만으로 설명되기 힘들다는 것이 더 비극일지 모른다. 원인이 규명되지 않은 채 깊고 어두운 바다에 가라앉은 꽃다운 어린 학생들에게 일어난 사건은 아직도 좀처럼 이성적인 설명이 가능하지 않다. 삼십여 년 전 세상의 권력을 잡기 위해 아무런 잘못이 없는 수민들 수천 명을 도륙한 이 나라의 前통치자는 자신의 명령이 '기억에 없다.'라는 말로 마무리하는 것은 사람이 한 일이라기 어려워 보인다. 신문이나 방송에 혹은 역사에 기록된 큰 사건뿐만이 아닐 것이다. 회사는 수억 원씩 적자가 나더라도 회사의 돈으로 철마다 신형 자동차를 바꾸어 타고 자신의 아들들은 병역을 피하기 위해 도미시키는 비용으로 충당하는 기업가 정신없는 사업가 모두 상식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일이다. 내일이 아니고 나와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분명 신을 믿고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들은 '악인' 더 나아가 '악마'라 정의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누가 더 나쁜 '악인'이고 누가 더 극악한 '악마'일까? 방송과 신문에 보도되는 사회사건의 범인들일까 아니면 역사 속에서 제대로 심판받지 않은 권력자일까, 혹은 그런 일들에 교묘히 묻혀가는 이기적인 사람들일까. 영화로 돌아가서 묘한 여인 '무명', 혹은 말미에 악마로 변태하는 일본인, 그리고 무당 '일광'의 실제 정체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결국 일본인은 '악마'이고, 일광은 그 악마와 교통 하는 협력자이고 무명은 그들을 막으려는 선한 영혼일까? 만약에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집으로 가지 않았다면 '무명'의 말대로 그 악귀들이 덪에 걸려 심판을 받게 되고 물러나게 되었을까? 종구 동료 조카인 가톨릭 부제가 믿음을 지켜 악마를 발현시키지 않았다면 비극은 없었을까? 아니면, 실속의 셈을 기반으로 일광의 말대로 살굿을 끝가지 마치고 그저 미끼 한 번만 물었다 놓았다면, 악귀들은 자신의 잇속만 챙기고 마을을 떠나지 않았을까? 아버지라는 이유로 경찰이라는 의무감으로 그들의 미끼를 삼켜 버린 것 자체가 비극을 부른 실수가 아니었을까? 역시 '만약에 말이야'하는 생각은 실익 없는 후회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 세상의 혼돈을 주는 악귀는 그 후회를 미끼로 우리에게 지금의 혼란과 혼돈을 정리하고자 하는 의지마저 빼앗아 버리는지도 모를 일이다.
생각을 주는 영화, 생각 없는 사람들
영화는 불편하지만 묘하게 매력이 있었다. 장르적인 혼합과 융합이 그러하였고, 곳곳에 있는 유머의 코드도 나쁘지 않았다. 특히 오컬트를 다루면서도 전통적인 무속의 신앙과 서양의 기독교 신앙을 대치시키지 않고 그저 one of them으로 쿨하게 바라보는 시선도 괜찮았다. '장닭이 세 번 울면 악귀가 덫에 걸린다.'는 '무명'의 주장도 성경 속의 베드로의 부인 장면과 시보로서 잡귀가 물러서는 전통적인 무속신앙을 함께 떠올리게 하는 재미있는 장치라 생각이 들었다. 죽은 줄만 알았던 가해자들이 다시 살아나고 머리가 쪼개지고 상처를 입더라도 죽지 않는 좀비의 모습은 한국에서도 좀비의 영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스쳐 지나가게 되었다. 많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물 중에서 좀비 영화야 말로 이 세상의 광기와 부조리를 이야기하는 좋은 이야기 재료라 생각을 늘 해왔었기 때문이다. 나홍진 감독의 영화를 보면 '먹는 것'에 집착함을 느꼈었는데 (그래서 하정우가 먹방 스타가 되었을지도), 이번 영화 '곡성'에서는 딸 '효진'의 모습을 먹는 것에 집착하는 '아귀'의 모습으로 보여 주면서 정점을 찍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또한 제작과 배급을 국내 재벌 그룹사의 계열사가 아닌 이십세기폭스가 맡은 것도 눈에 띄었다. 이전에 '추격자'로 대박을 얻은 나홍진 감독의 손익정산에 대한 이야기를 존경하는 오동진 선생님께 들은 적이 있는데, 분율 및 기타 배급수수료를 제하고 700만 영화로 제작사인 나 감독이 남긴 금액은 7억이라고 들었다. 7억이라 하면 매출 손익으로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겠지만, 나 감독은 '추격자'를 만들기 위해 사무실을 꾸려 7년 동안 분투하였다고 한다. 7년 동안 7억, 아마 이런 트라우마로 갑질 천국인 국내 재벌사가 아닌 해외 제작, 배급사를 선정하지 않았나 하는 오지랖 가득한 생각도 잠시 하게 된 영화였다. 영화가 생각을 많이 던져 주는 것은 좋은 일이라 생각하고, 그런 영화는 내 기준으로 좋은 영화임에 틀림없다. 이 세상이 혼란스럽고 혼돈한 것도 문제이지만, 그런 혼란과 혼돈을 그저 내일이 아닌 '세상일'로 치부하면서 영화 '곡성'을 그저 '어려운 영화', '재미없는 영화'라 이야기하며 아무 생각 끄집어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무섭다. 어찌 되었든 부조리하고 이해되지 않는 참극이 연일 일어남에도 소리 없는 이 세상은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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