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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읽기

[영화리뷰: 아가씨 (2016, The Handmaiden)] 사기꾼들의 반전없는 해피 엔드

by 박 스테72 2020. 2. 6.

일찍 부모를 여의고 이모부(조진웅)의 후견으로 살아가는 귀족 아가씨 히데코(김민희)는 다섯 살 이후로 거대한 성같은 집밖으로 나가 본적이 없다. 그녀의 유일한 일과는 이모부가 금 쪽 같이 아끼는 고서들을 낭독하는 일이다.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을 그녀에게 타고난 사기꾼 백작(하정우)가 접근한다. 백작은 그녀의 재산을 가로 챌 요량으로 유명한 도둑의 딸이자 장물아비의 손에서 자란 숙희(김태리)를 그녀의 하녀로 위장하여 저택으로 들여 보내게 된다. 숙희는 백작의 지시대로 아가씨가 백작에게 사랑에 빠져 결혼하도록 아가씨에게 노력한다. 그런 중에 숙희는 아가씨에게 홀린 듯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백작의 추궁에 계획한 일을 진행하고 마는데……

백작은 계획대로 아가씨의 상속 재산을 가로채고 숙희는 아가씨에 대한 사랑을 그만거둘 수 있을까? 

1. 말끔한 너무도 매끄러운 영화

오랜만에 충무로로 돌아 온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말끔한 영화’라 할 수 있겠다. 장르의 꼬임도 없고 반전은 있으나 예상 가능하고 결말도 칼로 무 자른 듯깨끗하게 매듭지어 진다. 지난 번 <곡성>에서 받았던 대 혼란함이 예방이나 내성을 준 것인지 몰라도 <아가씨>는 매끄러운 이야기로 당연하다는 결말로 끝난다. 영화에서 사기꾼 백작이 숙희와 히데코에게 말한“얼음이 손에 닿으면 ‘아 차가워’ 하고 불이 손에 닿으면 ‘아 뜨거’ 하듯이 반응을 보이는”그런 결말이다. 얼음은 차고 불은 뜨겁고 그런.

이전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대부분 ‘무겁고’ ‘난해하다’라는 인상이 가득하였다.복수 3부작이라 이르는 <복수는 나의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의 경우 ‘복수의 플롯’을 전형적으로 보여 주면서 진정한 선인과 악인의 경계가 모호하게 표현한다. 복수의 이유는 있으나 그 복수의 방법 사회적으로나 관념적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고 결국 복수의 행위 자체가 또 다른 악행으로 연속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영화의 ‘권선징악’적 결말은 의외라 생각이 들었다. 할리우드 연출작<스토커>에서는 더욱 더 등장인물을 선과 악으로 이분하기어려웠다. 모호함 이야 말로 박찬욱 감독의 제작사 이름인 “모호필름”으로 대변 되듯이 그의 필모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 아니었나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박찬욱감독은 이번 <아가씨>에서 그 모호함을 과감히 걷어 버렸다. 줄곧 무겁고 가라앉고 애매모호한 영화 제작에 지쳤다고 말하듯이 <아가씨>는 분명한 결말과 확실한 이야기 진행으로 박찬욱 영화 중 가장 가벼운 영화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2. 사랑, 사기 그리고 섹스, 가짜

가혹한 고문과 체벌, 비정상적인 성적 표현과 섹스, 그리고 절대절명의 순간에 내 뱉는 비웃음 같은 유머 코드. 이런 것들이 박찬욱 감독영화의 주요한 키워드가 아닐까 싶다. 이번 영화 <아가씨>에도 이와 같은 주요 키워드는 모두 표현되었다. 후견인인 이모부 코우즈키는 집착하는 변태적 성적 묘사가 가득한 고서를 모으고 그 고서들을 자신의 여인들 – 아내와 조카 히데코(아내의 사망 후에 정혼자가 되는)에게 낭독하게 한다. 그뿐 아니라 지하실에 남녀 들 성기 표본과 각종 성적 학대 도구들을 채비하는 것부터 이전 박찬욱의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남녀 간의 사랑을찾아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숙희와 히데코 사이의 감정과 동성간의 섹스가 오히려 어렵지 않게 받아 들여 질정도이다. 이렇듯 박찬욱의 영화에서는 극단적인 비정상을 전면으로 배치하여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관념을 낯설게만든다. <아가씨>에서 백작이 자신이 파 놓은 함정에 오히려자신이 빠져 종국으로 치닫게 되는 이유가 ‘사랑’이라는 것이 매우 낯설은 이유이기도 하다.

또 한가지 영화 <아가씨>에서 놓치고 가기 힘든 것은 ‘가짜’에 대한 단상이다. 영화에서는 많은 ‘가짜’에 대한 담론들이 이어진다. 우선 등장 인물 대부분이 ‘가짜’이거나 ‘가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들이다. 사기꾼 백작의 신분 이야 물론 그의 조력자 숙희도 ‘가짜’ 신분으로 히데코에게 접근한다. 그뿐 아니라 숙희가 함께 지낸 사람들도 내 놓으라 하는 도둑에 장물아비, 소매치기들이다. 히데코의 이모부 코우즈키도 신분의 상승과일본인으로 살기 위해 전처와 이혼하고 일본의 귀족 집안과 결혼한 가짜 일본인인 것이다. 코우즈키는 막대한 재력으로 사 모은 고서들을 어쩔 수 없이 팔아야 할 때 가짜를 만들게 되고, 그 가짜를 만드는 사람은 다름아닌 사기꾼 백작이었다. 그러나 이 ‘가짜’를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굳이 밝히려 들지도 않는다. 그 ‘가짜’들은 각자에게 필요한 대체재나 수단이고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를 등치는 사기의 순환구조에서 이 ‘가짜’는유용하기 때문이다. 낭독회에 참석한 귀족들이 진짜 섹스가 아닌 낭독되는 이야기에 흥분하며 자극 받는 ‘가짜섹스’처럼, 각자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가짜’는 필요충분 조건이었 을지도 모른다.

3. 장갑 낀 아가씨

영화에서 히데코는 특별한 순간을 제외하고는 장갑을 끼고 다닌다. 물론 이모부가 어렵사리 모아 놓은 고서를 만져야 하기에 장갑을 끼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외에도 잠을 자거나 특별한 순간이 아니면 늘 장갑을 끼고 있다. 감독의 의도야 직접 물어 볼 수 없어서 알수는 없지만 그 장갑의 의미는 영화 내내 중의적이었다.

장갑의 목적 이야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크게 보면 두가지로 양분된다. 자신의 손을 보호하기 위해 착용하는 장갑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자신이 접촉하는 대물,대인을 보호하기 위한 장갑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장갑은 원래 계급을 구분 짓기위한 도구로 시작되었다는 역사적 유래도 찾아 볼 수 있다. 이렇듯 히데코의 장갑은 자신의 상황과 마음의 상태에따른 상징적 표현으로 쓰였을 지도 모른다. 히데코가 숙희를 사랑의 대상으로 성적인 유희의 대상으로 대하면서서로 나누는 섹스를 할 때는 장갑을 벗고 한다. 그리고 가짜 결혼을 올리고 산속 암자에서 백작과 초야를 연기할때도 장갑을 벗고 자위를 한다. 그리고, 숙희와 모든 상황을 역전시키고상해로 가는 배를 타는 순간에는 장갑을 벗은 손으로 숙희의 구두 끈을 다시 매어 준다. 히데코의 장갑은 그녀의 본질을 억지로 가둔 코르셋이었을지도 모른다.

겉으로 유약해 보이나 어려서부터 이모부에게 학대를 받고 강요를 받아 온 히데코는안으로 매운 강단함을 지니고 있다. 그런 그녀가 세상의 모든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위해 장갑을 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자신의 속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장갑을 끼고 다녔을 수도 있다. 하물며 손까지 차게 해서 자신의 체온을 남들에게 전달하지 않으려 애썼을 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가 숙희를 만나면서 마음을 열고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 주기로 한다. 그리고 장갑을 벗는다. 히데코와 숙희의 등장 장면 특히 정사신이나 야릇한 러브신에서는 늘 두 사람을 대칭적으로 표현한다.마치 데칼코마니를 보듯 섹스를 나누는 두 사람의 체위도 대칭적이고 그 둘을 따라가는 카메라 앵글도 데칼코마니 찍듯 대칭으로담아 낸다. 장갑을 벗은 히데코는 자신의 계급이나 상황을 내려 놓고 숙희와 동등한 눈높이에서 사랑을 하기로한 것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정사신에 은방울 두 개씩을 자신들의 음문에 넣어 사랑을 나누 듯 사랑이란 두사람이 늘 평등하다는 것을 말해 주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코우즈키의 집착이나 백작의 사랑은 그런 면에서 퇴색되었을것이다.

4. 사랑이라 쓰고서 평등이라 읽는다.

“이야기는 과정이 중요한 거야.”

코우즈키가 백작을 잡아 들여 가혹한 고문을 하면서 히데코와의 초야를 자세히 이야기하라고추궁한다. 백작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백작에게 히데코와의 첫 정사를 묘사하기를주문한다. 하지만 백작은 두리 뭉실 비유적으로 결론만 표현하고 만다. 손가락을 다 잘린 사기꾼 백작보다 초야의 과정을 듣지 못한 코우즈키의 박탈감은 더 컸을 것이다. 이렇듯 영화는 악한 자들은 빈손이 되고 선한 사람은 원하는 부와 사랑을 모두 가져 간다는 전형적인 ‘권선징악’적인 결말을 보여 준다. 누군가는 빈손이 되고 어떤 이는 가득 안고 가지만 결말은 매우 공평하게 다가 온다.

평등이란 ‘합리적인 차별’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획일적인 균등이 평등이 아니라 각자의 입장에서 이야기의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결과가 합당할 때 평등이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 <아가씨>는 이런 ‘합리적인 차별’인 평등을 이야기 하고 있다.사랑 앞에 계급이나 국적의 경계가 무너지는 식상한 평등도 있지만, 영화에서 가장두드러지는 것은 ‘성적(性的)’인 평등이다. 그것이 Sexual이 되었든 Gender에 대한 견해가 되었든 영화에서의 성적인 무게감은 상반되어 있다. 영화의 시점은 1,2,3부로 나누어 시점이 변환되지만 전체적인 영화의 시점은 여성의 시점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물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힘이 있는 남성에게 박탈 당하고 착취 당하는 여성이 만연한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여성의 승리라는 결말은 평등을 이야기 하고 있다. 여성간의 동성애 코드도 마찬가지이다. 영화 시사회 때에 여성들에게는 자극적이지만 남성에게는 밋밋한 정사신이라는 표현을 듣고 가장 본연적인 성역할에 대해서도남성 중심적인 획일화를 느낄 수 있었다. 이런 획일화 된 편협한 가치관에 자극을 준다는 자체가 이 영화의 힘이아닐까 싶기도 하다.

영화의 영어 제목은 “The Handmaiden”이다. <아가씨>의 영어 제목이 ‘시녀,하녀’라는 것도 또 다른 의미를 던져 준다. 보통 영어에서 하녀는 ‘housemaid’으로 표현한다. ‘handmaiden’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하녀라기 보다 보완을 해주는 역할을 이야기한다. 영화에서 숙희가 히데코에게젖을 물리면서 ‘나에게 젖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아가씨 젖을 먹일 수있게’라고 하듯 숙희는 히데코에게 없었던 엄마와의 기억을 보완해 주는 존재로 자리매김했을 지도 모른다.

5. 잘 만든 영화, 그러나 조금 아쉬운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볼 때마다 이유 모를 질투 같은 것이 느껴진다. 영화의 문법이 분명하고 참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회화적인 표현과 무겁고 질감있는 표현의 촬영 그리고 [테레즈라캉]이나 [핑거 스미스] 등 문학에서 주제와 줄기를 차용하는 방법까지 박찬욱 영화는 영화에 관해서라면볼 것이 참 많다. 특히 이번 영화 <아가씨>에서는 ‘벽지’가 참 눈에 많이 들어 왔다.세련되지는 않지만 묘한 정방형 무늬가 들어 있는 벽지들이 공간들 곳곳에 눈에 띄게 되었다. 나중에 찾아 보았지만 영화 <올드보이>의 제작진이 많이 참여 하였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 <올드보이>에서 오대수가 오랜 기간 감금되어 있었던 그 골방의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었다. 영국식과 일본식을 섞어 놓은 고택의모습이나, 사드에서부터 금병매까지 열거 되는 남녀상열지사 일본식 고서로 만드는 소품들이나, 이모가 목메어 달린 큰 벚꽃나무까지 이렇듯 박찬욱 영화는 생각보다 ‘볼 것’이 늘 참 많다.

잘 만든 영화이지만 아쉬움은 많이 남았다. 사람들 마다 의견이 부딪히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영화란 시대의 정신을 담아야 한다는 것이 내생각이다. 이 시대의 아픔과 부조리를 이야기해주는 가장 좋은 매체가 영화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가씨>에서도 가짜중의 가짜 코우즈키같은 사람을 보면서 “친일파”들과 그들의 잔재를 유추해 볼 수는 있다.박찬욱 영화는 대부분 이 시대와 사회를 이야기하기 보다는 ‘개인’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개인의 일탈과 부조리 그리고 복수와 보속, 이런 것이 박찬욱 감독 영화의 주된 이야기였다. 그간 박찬욱 감독의 사회적 발언과 행보를 볼때 그의 사회적 참여에 대한 의지와 생각은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영화는 현실보다는 조금 형이상학적이다.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과 맞닿은 부분을 찾기는 무척 어렵다. 물론 ‘개인’에 대한 이해와 성찰이 곧 사회에 시대에 반영되는 밑거름이 되는 것은 맞다.그리고 그런 메시지를 감독은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지금 이 삭막한 세상을 사는 우리들은 둘 중 하나이다. 무관심하거나 무지하거나.

좋은 이야기를 좋은 볼거리로 만들 수 있고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주목을 받는박찬욱 감독이 다음에 만드는 영화는 보다 직관적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게는 최고의영화쟁이로 남아 있다. 한 숨 쉬고 가는 이영화 다음의 작품이 기대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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