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언니와 함께 생활하던 막내 에일리스(시얼샤 로넌)은 아일랜드를 떠나 뉴욕 브루클린으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괴팍한 켈리 여사의 소매점포에서 일하는 것이 답답하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경리일을 하는 언니의 수입으로는 한 식구라도 입을 더는 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타본 바닷길에서 멀미와 싸우면서 우여곡절 끝에 브루클린에 도착한 에일리스는 어린 나이 임에도 불구하고 의연하게 하숙생활과 백화점 점원 생활을 시작한다. 의연한 척하였지만 점점 고향과 그곳에 있는 언니와 어머니에게 돌아 가고 싶은 생각은 깊어만 가고 향수로 인해 일상생활에서 늘 우울하기 마련이다. 이러던 중에 후견인 신부님의 권유로 야간대학을 다니면서 새로운 꿈을 꾸게 된다. 그리고 외로운 어린 여인에게 이탈리아 이민자 토니(에모리 코헨)가 나타나고, 화려하지 않지만 진솔하고 성실한 그에게끌려 사랑에 빠지고 아무도 모르게 둘만 혼인신고를 한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아일랜드에서 언니가 급사를 하게 되고 그일로 고향으로 돌아 온 에일리스는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고향 땅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제법 부유한 귀족 출신 아들 짐 패럴(돔놀 그린슨)과 소위 썸을 타게 되고, 순박하지만 듬직한 그에게 빠져 들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결혼한 몸. 당장 보이지 않는 내일이라는 희망을 위해다시 미국으로 돌아 갈 것인지, 아니면 약속한 그 사랑을 저버리고 이 곳 고향 땅에 눌러 앉아 담보된 안락함을 누릴 것인지 고민하게 되는데……
그녀는 어디로 돌아 갈 것인가?
요즘 ‘강한’ 영화가 대세이다. 이리 저리 미끼를 던지면서 뒷말을 무성이 만들어 내는 영화부터, 파격적인 노출 여배우의 개인적인 위험한 사랑의 이야기까지 더해 더 주목을 받는 영화까지 정말 ‘센’ 영화들이 쏟아 지고 있다. 그 사이 사이에는 아포칼립스와 세계설화를 넘나들며 넘쳐나는 볼거리로 정신 없게 만드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도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다. 이러다 보니, 작지만 좋은 영화를 접할 기회는 점점 줄어 드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영화 <브루클린>은 세지도 강하지도 크지도 않은 어정쩡한 영화이다. 그렇다고 유려하고 독창한 미장센이나 드라마 투르기로 참신함을 주는 비주류 영화도 아니다. 영화는 1950년대 미국에 이민한 아일랜드 여인의 이야기를 아주 큰 사건 없이(?) 이야기한다. 당연히 반전도 없고 서스펜스나묵직한 복선도 없다. 그냥 그럴 만한 일들이 일어나고 그것들이 시간과 함께 해결되며 지나 간다. 결말 마저 해피하게 보인다.
영화 <브루클린>은밋밋해 보이는 영화이다. 하지만, 조금은 다른 시점으로 영화를 바라 본다면 마음이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영화는 이전 미국 이민사를 그리는 영화들처럼 대단한 역경의 사건들이 등장 하지도 않고, 사건이 사건을 무는 그러한 일들도 벌어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여인의 시점으로 풀어낸 이야기라 이전 미국 이민사 영화와는 다르게 바라보는 것 같다.
전후(前後)의 유럽이 그러하였듯 아일랜드의 1950년대의 경제상황은 최악이었다. 무엇보다 고립된 지리적 특징과 역사적으로 끊임없는 기근이라는 가난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의 유산처럼 아일랜드는 가난한 나라였다. 1800년대 중반의 ‘감자마름병’에 의한 기근이 대표되듯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가난은 국적과 같은 지긋 지긋한 살(殺)로부터의 탈출은 늘 그리는 희망고문이었을 것이다. 그 희망의 반대편에는 미국이 있고, 그 미국의 상징적인 도시 뉴욕이 있었다.
뉴욕은 국가의 역사에 비해 도시의 역사로 보면 제법 의미가 있는 연한을 지니고 있다. 그 중심에는 ‘이민자의 도시’라는것이 저변에 깔려 있다. 뉴욕은 크게 다섯개의 자치구로 구성되어 있다. 미국을 가지 않아도 잘 아는 맨하튼, 그리고 그 옆의 스테이튼 아일랜드, 브롱크와 브루클린, 퀸즈 이렇게 다섯개의 구로 나누어져 있고, 다섯개의 자치구는 각각의 특색이 확연하다. 맨하튼은 이민자가 되었건 미국의 토착 이민이 되었건 성공의 상징으로 중 상류 층과 경제 주류가 모여 사는 곳이고, 퀸즈는 한인타운으로익숙하다. 브롱크는 흑인들과 저소득층의 구역이라는 인식이 크고, 브루클린은 작은 유럽처럼 유럽이민자들이 모여 형성된 그런 지역이다.
영화 <브루클린(2015, 존크로울리 감독)>은 그 뉴욕 자치구 중 두번째로 큰 ‘브루클린’으로 이민 온 1950년대의 아이리쉬 여인의 이야기를 잔잔하게 풀어낸다. 잔잔하다 설명하였지만, 인생이 살아가면서 잔잔한 날이얼마나 있겠는가. 하지만, 지나고 돌아보면 그리 험한 길은아닌 것처럼 느끼듯 미국에 홀로 온 아일랜드 이민자 여성의 이야기는 잔잔하게 다가 온다.
“이분들이 돌아 갈 곳은 없지요. 가면 누가 좋겠어요. 그래도 이분들이 도로를 놓고 터널을 뚫고 이나라를 만든 사람들입니다.”
영화에서도 크리스마스 날에 성당에서 교구의 아이리쉬 독거 노인들에게 음식을 베푸는 자리에서 신부는 에일리스의 물음에 대답한다. 남자 시점의 이민사는 이들이 도로를 놓고 터널을 뚫는 이야기를 풀어 냈을 지도 모르니, 이영화는 이렇듯 심심하다. 하지만,미국 이민사에서의 사건의 주역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에서의 선택의 주인공이라는 관점으로 본다면 영화가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가볍지 않다. 아니 오히려 묵직하고 어렵다. 극적인 무엇이 아니라 일상에서 그리고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될 선택지를 영화에서 보게 된다. 세월이 흐른 지금의 상황에서도 그 선택지는 가볍게 생각되지 않는다. 살아 간다는 것, 그리고 살아 낸다는 것은 결코 가벼울 수 없기 때문이다. 반 구십의 중년이 바라보는 관점도 그러한데 에일리스 나이의 이 나라 젊은이들에게는 매우 힘든 주문이 될지도 모른다.
향수(鄕愁): 마음 속의고향은 떠나 온 곳일까, 머문 곳일까
“향수병이란 다른 병과 다를 게 없어요.
비참한 기분이 들게 한 다음에 다른 사람한테 옮겨 가는 것이죠.
그럼금방 괜찮아 질 겁니다.”
에일리스가 향수병을 이기지 못하고 힘들어 할 때 신부님이 면담을 하면서 이야기 한다. 고향에서 오는 편지가 처음에는 엄청 오래 걸리지만 나중에는 금방 받게 될 것이라고. 갑자기 해외 우편시스템이 발전하는 것을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두는 준거에 따라 그 기다림의 시간은 달리 느껴 진다는 것이다. 두고 온 시간은 느릿 하지만, 지금 이곳의 시간은 금새일 테니까. 마음 준거의 상대성 원리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이 영화에서의 가장 큰 갈등 구조는 에일리스 마음 속의 선택의 갈등일 것이다. 미국으로 돌아 갈 것인가 아일랜드에 남아 있을 것인가 하는 표면적인 거취의 선택이 주어 진다. 그속에서는 많은 함의 적인 대칭적인 표본의 선택지가 나열된다. 아일랜드 고향 남자 짐 팸튼이냐 아니면 이탈리아 남자 토니인가의 선택, 그 안에서는 이미 상속 예정자 대지주의 아들과 미국 이민자 배관공 중의 선택이 있다. 그 뿐 아니다. 북적대고 항상 새로움으로 가득한 뉴욕인지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고향마을 일지 고민하게 된다. 그 안에서는 비유적으로 사람많고 붐비는 코니 아일랜드 해변과 사람이라고 찾아 볼 수 없는 고향 아일랜드 해변이 대치 된다. 그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유행과 관심에 귀를 기울이는 뉴욕에서의 생활고 다른 세상에 큰 관심 없었던 고향 아일랜드의 생활도 비교된다.
“옛날에도 이랬으면 좋겠어요”
에일리스는 짐 패튼과 해변을 걸으며 이야기한다. 이 전에도 이 고향에 일자리랑 이런 인연들이 있었으면 좋았겠다고 그러면 미국에 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지금 이 선택지로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중간의 인연과 과정이 생략되고 이전 그 시간에 지금의 모습으로 있으면 참 좋겠다는 그런 생각. 살아가면서 힘든 순간에 늘 하게 되는 생각, 그리고 힘든 시간들을 견디고 나서 시간들을 아쉬워하면서 항상 하던 생각, 그 생각을 에일리스는 이야기한다. 푸념처럼. 푸념은 현실화 되지 않은 바램의 방언이니까. 토니가 8살 막내 동생에게 교정을 받아 가며 보내온 편지를 에일리스는 바로 뜯어 보지 않는다. 그의 이야기를 그의 사랑한다는 단어를 발견하면 무너질 것 같고, 그러면 이곳 아일랜드에서의 평온한 삶은 잊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담 켈리의 도발로 그녀는 자신이 미국에서 결혼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결심한다.
“잊었어요. 이 마을이어떤 곳인지.”
사람이 살면서 자신이 살아 온 궤적을 변경하여 새로운 국면으로 때로는 새로운 곳으로 향할 때가 있다. 그 곳에서의 삶은 녹록치 않고 힘들다. 생소하고 불편하다. 그러던 중에 의지할 사람이 나타난다. 그 사람에게 의지하고 내일을 그리고자 다짐해 본다. 당장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그 사람은 롱 아일랜드의 넓은 대지를 보여 주며 그곳에서의 일상에 대해 고백한다. 함께 하고 싶어 진다. 그래서 그렇게 하겠 노라 결심하고 그의 제안과 청혼을 받아 든다. 그러다 우연치 않게 예전의 그곳으로 돌아가 본다. 익숙함과 함께 이전보다 나를 더 중히 대하는 이곳이 고향이다 생각이 든다. 진작에 이러지 못했을까. 못본 것일까 모른 척 한 것일까. 하지만 간과한 것이 있다. 지나 온 그 타지에서의 경험과 보살핌과 관심으로 내가 달라 졌고,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는 것을. 잊었던것이다. 내가 왜 떠나 왔고, 이 곳이 어떤 곳인지 말이다.
세상에 아주 늦은 것은 없다. 일단 해 내고 난다면 늦었다는 것은 잊혀지기 마련이다. 선택의 순간에서 가장 후회하는 것은 ‘조금만더 생각해 볼 것을’ 하는 후회이다. 다시는 돌아 오지 않을것이고 나는 이미 돌아 갈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가고 싶은 그 곳이, 돌아 가고 싶은 그 사람이 아직 그곳에 있다면, 세상에 늦은 것은 없다. 그냥 돌아 가면 된다. 그 곳에서 소중한 일상을 삶을 이어가면 되는 것이다. 늦은 선택이란 없다. 바른 선택인지 잘 못된 선택인지가 있을 뿐이다.
“그러다 어느 날 태양이 뜰 거에요.
바로 알아 차리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렇게 희미하게 다가와요.
그 때 오로지 당신만의 사람을 만나게 돼요.
그럼 깨닫게 되겠지요.
거기가 장신의 인생이 있는 곳이라는 것을.”
PS)
#1 영화의 볼거리는 색감이라 할 수 있겠다. 자칫 우울한 시대를 경쾌한 색들로 가득 채운 것은 지나온 삶은 어쩌면 모두 경쾌할지도.
#2 시얼샤 로넌…… 최근만난 여배우 중에 가장 남았다. 눈에 머리에 마음에. 그녀가5년전 <한나(2011)>에나온 살인병기로 길러진 소녀 킬러였다는 것을 떠 올리고 더 놀랐다. 앞으로 지켜 볼 1인
#3 시점, 관점은 이야기를풍성하게 해 준다. 내가 너가 되어 보고 네가 내가 되어 볼 때. 문제라는게 어렵지 않게 해결될 수도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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