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로스티스트인 미사키는 어린 시절 헤어진 아버지가 해상사고로 8년 전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갑자기 듣게 된다. 그것도 아버지가 남긴 채무의 상속 통보로 말이다. 미사키는 큰 주저함 없이 아버지의 채무를 승계하고 그가 남긴 바닷가 작은 창고로 찾아 든다. 그 인적 없기로는 둘도 없는 장소에서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자신의 별명을 딴 '요다카 커피'의 문을 연다. 그 카페의 지척에는 두 아이를 두고 홀로 타지로 일을 나가는 에리코가 살고 있다. 매일 밤, 집 앞에서 아이들은 엄마 에리코를 기다리고, 엄마 에리코는 자신을 사랑해 줄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 곁에는 어린 시절 헤어진 실종된 아버지를 기다리는 미사키가 있다.
세상의 끝에서 이들은 기다림의 끝을 보게 될까? 그 끝은 행복일까, 불행일까?
서울 서촌 카페 '반하다'에서 만난 대만 여류 감독 치앙시우 청의 영화의 첫 느낌은 무척이나 페미니즘적이라는 것이다. 영화에는 남성을 찾아 보기 힘들다. 역할도 미미하거나 스쳐 나올 정도이고, 남성으로 인한 사건도 직접 발생하지 않는다. 어려서 헤어져 실종된 미사키의 아버지나 실체를 알 수 없는 에리코 두 아이의 아버지의 부재가 큰 모티브를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부재 자체를 해결하는 이야기 구조를 지니고 있지는 않는다. 그 부재를 막연한 기다림으로 시작하여 현실적인 대안의 모습으로 빈자리를 채워 가는 결말 구조를 지니고 있다. 아마 이러한 영화 읽기가 여성 감독 치앙시우 청의 '감독의 시선'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영화를 바라보는 중년 남성으로서의 '나의 시선'은 조금 다른 곳에 닿아 있다. 영화는 '기다림'을 이야기하고 '기다리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의 영어 제목은 'The Furhest End Awaits'이다. '세상의 끝에서 기다리다.'정도로 해석될 수 있는 이 영어 제목으로 영화가 전반적을 이야기하는 '기다림'을 더욱 확인할 수 있었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저마다의 사연과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미사키는 4살 때 부모의 이혼으로 헤어진 부친을 기다리고 있다. 그 부친이 8년 전 생선잡이 조업을 나가서 실종이 되었고 실질적으로 사망 선고에 준하는 증거들이 발견되지만 미사키는 그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다. 그 기다림을 위해 자신의 커피 로스팅 작업장을 아버지가 남긴 창고로 옮기고 그곳에서 막연히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다. 에리코의 두 아이들은 타지에 나가 돈을 벌어 올 수밖에 없는 엄마 에리코를 매일 같이 기다리고 있다. 에리코는 자신을 사랑해 줄 사람을 애타게 기다린다. 몸을 팔아 생계를 이어 가는 에리코에게 그 사랑이 직접적으로 수입을 가져다 주는 스쳐가는 인연이 되었든, 진정 자신의 온몸을 기댈 수 있는 연인이 되었든 에리코는 사랑을 기다린다. 그 뿐 아니라, 미사키 아버지와 함께 실종된 '유타카호' 선원 가족들도 매일 찹쌀 떡 반쪽을 남겨 놓은 마음처럼 돌아오지 않은 자신의 아버지와 남편을 기다린다. 아마 병원에 입원한 에리코의 양할머니도 매일 문병 오는 에리코와 두 아이들을 기다리거나 자신의 완치와 퇴원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나오는 주요한 매개인 커피도 그러하다. 미사키가 사람들에게 내려 주고 내리는 방법을 알려 주는 핸드드립 커피도 기다림의 대명사이다. 종국에 에리코와 아이들은 '요타카 카페'를 떠난 미사키를 매일 밤 기다리게 된다. 바닷가 세상 끝에 걸리 카페 외등을 밝혀 놓으며 언제고 돌아 올리라 바라고 바라는 미사키를 그렇게 기다린다.
영화를 보면서 기다림의 목적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기다림의 목적은 만남인 것일까? 아니면 발견과 자각인 것일까? 기다림의 종결은 결국 만나거나 만나지 못할 것이 분명한 상황의 인지 두 가지가 아닌가 싶다. '기다림'의 목적이 언제나 '만남'이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바라고 바라도 만날 수 없는 무언가를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도 분명 '기다림'인 것이다. 세상을 떠난 부모가 되었든, 옆자리를 비우고 딴 사람의 인연이 된 옛 연인이 되었든 기다림에 반드시 '만남'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막연한 그리움을 '기다림'으로 가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 기다림의 완결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자각'이나 자신의 현실을 확실이 파악하는 '발견'이 기다림의 결과가 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기다림에는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기다리든 무엇인가를 기다리든 기다림에는 바라는 바가 있다. 그래서 영화의 영어 제목에서도 Wait라는 자동사 대신 Await라는 목적어가 필요한 타동사를 사용했을지도 모른다는 주변 생각도 함께 해본다.
영화에서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서로의 '이름'에 대한 여러 장면들이었다. 에리코의 막내 아들 쇼타는 이름을 호명하지 않는 미사키를 사사건건 지적한다. 미사키나 아리사의 학교 담임, 에리코도 서로의 마음을 여는 첫 번째 마음의 도어 오픈을 통성명으로 시작한다. 카페 이름 '요타카'에 대한 이야기도 그러하고 미사키의 아버지의 동료 선원 가족들과의 만남에서도 그 통성명은 서로의 관계를 위한 연결고리로 작용하고 있다. 서로의 이름을 불러 주고 서로를 인지한다는 것, 이 것 또한 존재에 대해 발견하고 자각하는 도구임에는 틀림없다. 아마도 영화에서의 결핍된 인생들은 누군가 자신의 처지를 공감하고 인지해 주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은 맘이 고달프기도 하지만 한편 설레는 일이기도 하다. 비록 그 기다림의 끝이 반드시 만남으로 귀결되지 않더라도 자신의 현재를 자각하고 발견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끝에서 먼 바다를 바라보는 기다림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 설렘 가득한 희망으로 보이기도 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만남이 되었든 자각과 발견이 되었든 기다림은 결국 무언가를 던져 주게 될 테니까.
한 때 한국에서도 일본 영화가 크게 붐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그림자 마처 찾아 보기 힘들 정도로 일본 영화를 상영관에서 마주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 되었다. 물론 일본 영화 제작과 산업의 자체적인 침체도 한 몫하겠지만, 대형 블록버스터가 아니면 외화를 접하기 힘든 한국 영화의 배급구조도 한 몫하는 것은 틀림없다. 무언가가 독주하고 독점으로 장악하는 것은 다양성에 대한 기회를 박탈한다. 하기사 역사교과서도 한 가지로 정리하겠다는 이 세상에서 영화의 배급 독점을 탓해서 무엇하랴 마는, 조금 더 다양한 영화를 자주 접하고 싶은 마음은 여전한 11월의 첫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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