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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읽기

[영화리뷰: 산이 울다 (2015, Mountain Cry)] 헌신에 산이 울고 사랑이 우는 솔직한 신파극

by 박 스테72 2020. 2. 8.

신파극 <산이 울다>

‘신파극’이란 일제 개화기 시절에 유행하였던 멜로드라마 형식의 연극을 지칭한다. 대체로 무르녹은 연애, 엽기적인 사건 등 강렬한 정서적 자극이 있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데, 대개는 주인공이 어려운 처지에 몰려 관중의 눈물을 자아내다가 끝에 가서 행복을 찾는다는 결말로 끝난다. 통속적인 윤리관에 입각한 권선징악의 교훈을 담곤 했다. 요즘에는 ‘신파조’라는 이야기로 그저 감성을 자극하여 사람들의 눈물을 짜내는 의도된 ‘졸작’을 대변하기도 한다. 제도와 관습을 벗어난 사랑에 대한 응징이라는이면에는 그 사랑이 이루어 지기를 간절히 열망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의 양면성을 교묘하게 자극하는 것이다. ‘신파’라는 것은 세련되고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이 세상에서는 그저 뒤쳐진 낡은 감정의 조각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뻔한 사랑이야기에 화도 내고 울고 함께 기뻐하기도 한다.

중국 영화 <산이 울다>의 극형식의 근간은 ‘신파’라고 할 수 있다. 1984년 중국의 고립된 산속 부족 마을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주된 이야기의 줄기는 두 남녀의 ‘애절한 사랑’이다. 이 산골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한총(왕쯔이)는 녹두를 갈아내어 팔아 생계를 이어 가는 시골 청년이다. 한총은 알만 한 사람은 다 아는 내연녀, 산 건너편에 사는 과부 친화(진구워)를 위해 아버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오소리를 잡아 그녀에게 가져다주곤 하였다. 그러던 중에 외지인이자 자신의 외양간에 기거하던 라홍(여애뢰)이 한총이 설치한 덫의 폭발로 다리를 잃고 결국 숨을 거두게 된다. 과실치사의 범죄를 저지른 한총을 두고 마을에서는 회의가 거듭된다. 그를 공안에 신고할 것인지 아니면 마을의 이미지와 새로운 촌장의 부임 등을 위해 덮고 갈지에 대해 의논한다. 마을의 회의에서 공안 신고 대신에 라홍이 남기고 간 벙어리 아내 홍시아(량예팅)와 어린 두 아이에게 한총이 금전적 보상을 하고, 그 보상에 대한 결정이 나기 전에 그녀의 가족을 보살피라 결론짓는다. 친화와의 결혼을 꿈꾸어 왔던 한총에게는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족쇄와 같은 형벌이 아닐 수 없지만, 당장 배상할 돈도 없고 감옥살이도 두렵기에 마지못해 그녀의 가족을 돌보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감정이 싹트기 시작하고, 결국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행복한 일들은 언제나 영원하기 힘든 것처럼 조용한 산골마을에 흉흉한 소문이 퍼지고, 결국 라홍과 홍시아 가족이 산골에 흘러들어온 이유가 들통나게 된다. 한총은 이런 사실을 알고도 그녀의 곁에 남을 것인가? 홍시아는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 한총과 소소한 행복의 날들을 이어 갈 수 있을까?

감추고 싶은 겉으로만 멀쩡한 이 세상

루쉰문학상을 수상하였다는 중국 여류작가 ‘거쉬핑’의 소설 [함산; 喊山]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제 20대 부산 국제 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되어 이름을 알린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영화도 극장에서 찾아보기란 쉽지 않았다. 상영시간을 맞추어보려 몇 번의 노력을 하다가 결국은 IPTV에서 VoD 구매하여보게 된 영화 <산이 울다>는 조용하지만 강한 영화였다. 영화는 위태 위태한 바위 산 위에 조심스럽게 자리 잡은 마을을 멀리서 보여 주며 시작한다. 절체절명의 급한 전갈이 있거나, 세상을 피해 도피하지 않는 한 외지인들이 쉽게 찾아오지 못할 이 산골 마을에서 위태한 전경과 달리 마을 사람들의 일상은 평온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시골 마을에도 말하지 못할 비밀과 사연들은 숨어 있었고 그런 와중에 한총의 폭약 덫으로 라홍이 죽게 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험악한 사건 사고가 연일 되는 요즘 세상에서 본다면 이런 작은 사건으로 무슨 요란 일까 싶기도 하지만, 30여 년 전의 공산주의 체제 중국에서의 ‘살인사건’은 사회의 주목을 받게 될 중차대한 일이 된다. 스탈린 시대 소비에트 연방 시기를 배경으로 만든 <차일드 44>에서 볼 수 있듯이 완벽에 가까운 사회체제 공산주의 국가에서 강력범죄, 그것도 생명을 앗아 가는 ‘살인사건’은 일어나서도 안되고 일어날 수도 없는 그런 사건인 것이다. 그래서 스탈린 시대에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서에는 ‘강력범죄’ 전담반이 없었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기도 하다. 세상과 고립되었지만, 자신들만의 기준에서 완전한 국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살인’이 발생하였다는 것은 국가의 존립을 위해 하는 거대 지악이기에 그 범인은 물론 가족, 주변 사회까지 철저하게 응징받는 연좌제가 적용되었을 것이다. 겉으로는 통제된 사회의 규범을 통해 세계 국가로 우뚝 서는 이 사회주의 국가에서 흠결이란 눈곱만큼도 허용되기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80년대 중국 사회를 축소해 놓은 것이 바로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산골마을처럼 보인다.

나름 마을의 지도자 들로이 루어진 마을의 회의 결과도 자신들의 마을이 ‘살인자 마을’이라 밖으로 알려지는 것이 몹시 두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법과 규준이 있음에도 마을 사람들 임의로 한총의과실에 대한 판정을 하고 처벌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살인은 실제로 존재하였지만 살인범은 없는 그런 마을이 된 것이다. 영화는 아마도 이런 이야기를 전달하며, 30년이나 흐른 현대의 중국도 다르지 않음을 이야기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사회주의’의 중심을 지키면서 세계 경제 대국을 이룬 중국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 안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14억의 중국 민중들의 삶은 실제로 그 거죽과 같지 않을 것이다. 빈곤과 폭거에 시달리고, 부를 이룬 당의 간부와 졸부들의 흘린 빵가루를 주어 먹으며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삶을 억지로 이어 나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단지 국가의 이미지를 위해 겉으로 아닌 척 그렇지 않은 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헌신과 희생 차이

그러나 개인적으로 다가 온 영화는 말 그대로 ‘아주 뻔한 사랑이야기’ 즉 ‘신파극’이었다. 주인공 한총은 사랑하는 상대에게 헌신하는 말 그대로 산골의 ‘사랑꾼’이다. 녹두를 갈아 내고 농사를 짓는 고된 일과 틈틈이 산속에서 오소리며 산짐승을 잡아 자신이 연모하는 과부 집에 진상하는 것이 중요한 일과였다. 홍시아의 가족을 억지 부양하면서도 그녀가 사는 외양간을 수리하고, 아이들의 식탁이며 요람을 만들어 내고, 결국 그런 연으로 말 못 하는 여린 여인을 지켜내려는 그런 사내였다. 여주인공 홍시아는 어떠한가? 어린 시절 할머니 손을 잡고 나간 시장 축제길에서 납치를 당해 살인자의 씨받이로 살던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을 돌보아 주는 사내를 사랑하게 된다. 그 남자를 위해 바느질을 하고 요리를 하는 것이 즐겁기만 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마을 사람들에 의해 곤궁에 빠지고 결국 공안에게 연행되어 가게 되자 자신이 사실혼 관계의 남편 라홍을 죽인 범인이라 자백하며 자신의 남자를 지켜 낸다. 그 자백이 진실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한총의 사랑이 억지 부양에서 시작된 연민이든 말 못 할 뿐 고운 여인에 대한 욕정이든 상관없다. 그들은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위해 희생이 아닌 헌신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 ‘헌신’과‘희생’을 혼용하여 사용하는 경우도 보았는데 헌신과 희생은 다른 면이 많아 보인다. 희생과 헌신에 대한 여러 언어의 어원에서 보면 희생은 ‘아낌없이 주기 위해 자신을 버리는 것’이고, 헌신은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해 ‘두 손을 충만이 채워 준다’라는 의미에 가깝다. 희생은 자신을 버리게 됨으로써 그 대상과의 관계는 현실계에서는 소멸되고 만다. 하지만 헌신은 대상을 충분히 채우기 위해 자신의 수고나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는 생성의 행위가 된다. 희생은 그 행위자로서는 목적 중심적이지 않지만 헌신은 사실 보상의 대가를 바라는 목적 중심의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의 사랑은 희생이라기보다는 헌신이라 할 수 있다. 서로 존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릎 쓰고 주변의 겁박을 이겨내는 것은 두 사람 사랑의 완성이라는 대가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이해타산적이라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헌신을 하는 이유가 무언가에 대한 보상이라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일 수 있다.

산이 울다. 사랑이 울다.

영화는 예상 밖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아주 상상 가능한 이야기들로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절절하고 애절한 사랑이 식상하기보다는 점점 더 그 두 사람의 이야기에 빠져 들고 어느새 그들의 마음을 함께 안고 간다. 지금의 위협과 어려움을 이겨내고 결국 사랑을 이어 가기를 원한다. 한총과 홍시아가 바라는 사랑은 거창하고 요란한 것이 아니었다. 마을회의에서 결정한 보상 판결문에 적혀 있듯이 ‘밥 세끼’ 함께 하며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일상의 삶이었다. 늘 오늘만 같기를 바라는 한가위의 마음이 바로 일상에 대한 영원한 염원의 속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사랑하는 사람을 떠 올렸다. 아니 사랑했던 사람을 떠 올렸다. 최근 수년 동안 개인적으로 힘든 일을 시즌마다 쏟아 내는 드라마처럼 겪어 내었다. 사회생활을 지속적으로 하기 힘든 순간까지 가라앉았다. 잘난 맛에 우쭐대며 살아온 인생의 쉼표는 자칫 조용히 있던 미움 가득한 사람들의 응징으로 마침표가 될 뻔하였다. 그러던 불빛 하나 없는 지하 감옥 같은 내 삶에 구원 같은 희망의 빛이 밀려들었다. 뻔히 닥쳐 올 어려움과 수고스러움을 ‘행복’이라 바꾸어 부르며 내게 헌신해 준 사람이 있었다. 참 고맙고 미안했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화 속의 한총처럼 모든 것을 버리거나, 주위의 다른 시선들을 물리치고 그 사람을 지켜 내지 못했다. 한없이 작아진 내가 부끄러워 다시 숨어 버렸다. 그 사람도 결국 그것들을 물리치지 못하고 자신의 헌신에 대한 보상을 받기도 전에 곁을 떠나 버렸다. 이런 아픈 현실이 역설적으로 매일을 반성문 쓰듯 열심히 살게 하는 이유는 되었다. 왜냐하면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뻔한 사랑의 신파극, 늘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인 이별한 후의 사랑노래를 누가 지겹다 하겠는가? 우리는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중국어 제목은 <함산(喊山)>이다. 한글 제목은 <산이 울다>로 표현하였는데, 한문을 직역하자면 ‘산이 소리치다’ 혹은 ‘소리치는 산’ 정도가 될 수 있겠다. 영화에서 벙어리로 나오는 홍시아는 남몰래 바위 산에 올라 대야를 두드려 가며 소리를 친다. 그 소리가 진성으로 나올지 아니면 가슴으로 지를지 모르지만 아무도 없는 그 산에서 소리를 친다. 홍시아가 소리치고, 그 산골이 소리치는 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감성에 대한 진솔한 고백이 아닐까 싶었다. 세상의 기준으로 멀리 해야 하는 사랑, 그리고 가족, 친구 때문에 자신의 감성을 숨겨야 하는 사랑, 겉으로 반듯한 이 사회를 위해 희생하는 사랑에 대한 고함일지도 모른다. 그 통제받는 부족 마을, 공안 중국 사회에서 자신들의 진심 어린 사랑을 ‘자백’과 ‘자수’로 세상에 알리는 것도 그 고함일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는 80년대 고립된 산골마을을 여과 없이 그려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주는 시각적 맛은 대단하였다. 꾸밈없고 정리되지 않은 동네를 멀리서 잡는 롱샷에서는 아름다움까지 느낄 수 있었다. 한총이 홍시아를 데리고 나간 노란 녹두밭 옆에 누렇게 바랜 키 큰 옥수수의 모습도 참 아름다웠다. 라홍의 장례를 치르러 가는 마을 상여꾼들이 뿌리는 종이 노자돈의 노란색도 인상적이었다. 사건은 있지만 거대하고 요란하지 않다. 유려하거나 빙글빙글 도는 카메라 워크도 없이 평평하게 마을과 사람을 담아간다. 그리고 그 위에 쏟아지는 햇볕이며 깊은 밤 호롱불의 따뜻함을 소리 없이 전해 준다. 가끔은 ‘신파극’을 보며 내 감성에 솔직하게 소리쳐 보는 것도 답답한 일상의 치유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을 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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