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펀드매니저 석우(공유)는요즘 되는 일이 없다. 전략적 투자처로 삼은 바이오 기업은 존폐의 기로에 서서 개미 투자자들의 희생을 감수하고 손절매 결정을 내리고, 부산에 떨어져 지내는 아이의 엄마는 시급한 이혼을 종용한다. 여기에 더해 딸 수안(김수안)은 생일을 핑계로 엄마가 있는 부산으로 가겠다고 마음 심란한 그를 괴롭힌다. 울며 겨자 먹는 시늉을 하며 딸과 함께 부산행 KTX 열차에 오른 석우는 지친 몸과 마음에 바로 잠에 빠지게 된다. 그들이 몸을 실은 부산행 KTX 101편의 출발과 함께 정체 모를 바이러스가 전국에 퍼져 들게 된다. 이내 전국은 긴급재난경보령으로 확산되고 열차 안에서도 정체 모를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이 승차한 것으로 드러나게 되고, 부산행 KTX101편에 몸을 실은 사람들은 무사히 그들의 목적지인 부산에 도달해야만 한다. 열차 안이나 밖 모두 안전한 곳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그들은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숨을 지키고 목적한 그곳에 당도할 수 있을까?
한국에도 선보인 첫 번째 본격 좀비 영화
영화의 장르는 이전보다 세분화되고 파편화 되고 있다. 심지어 각 영역의 장르들이 융합을 하면서 새로운 장르나 변용되는 파생 장르를 지속적으로 창출하고 있는 것이 요즘 영화판이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영화의 장르를 물어 오면 서슴없이 말하는 장르가 “좀비물”이라고 대답한다. 비단 영화뿐 아니라 소설이나 웹툰도 좀비 이야기라면 빼놓지 않고 찾아 보고 미국 유명 드라마 <워킹데드>도 연이은 시리즈의 공개를 기다리며 완주하기도 하였다. 마음속에 기묘한 기질이 숨어 있어서 그러할 수도 있지만, ‘좀비’에 의해 유린되는 일상을 보고 있노라면 한편의 안도감과 다른 한편의 불안을 함께 느낄 수 있다는 점이 개인적인 관심을 끌어당기는 요소이다. 그리고, 애써 가면으로 감추어 온 인간 본연의 욕구에 대한 솔직한 고백을 빙빙 둘러 이야기할 수 있는 배설구 같은 장르이기에 내 개인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장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무더운 여름에 개봉한 <부산행>은 영화 제작시기부터 관심이 많았던 작품이었다. ‘좀비물’이라는 장르적 선호도에서 이미 기울어진 관심이 시작되었고 <돼지의 왕(2011)>, <창(2012)>, <사이비(2013)>에서 번쩍하는 충격을 주었던 연상호 감독의 첫 번째 실사 상업영화라는 점이 기대와 관심을 몰아가게 만들었다. 영화에 대한 완성도와 그 이야기에 대한 평은 잠시 뒤로 하고서라도 한국에서의 첫 번째 본격 좀비물 상업영화의 등장이라는 것만으로 많은 관심을 받는 것은 당연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21세기 대세 영화 장르 ‘좀비물’
좀비 영화는 1930년 대 등장한 <화이트 좀비(1932)>로부터 시작한다고 전해지는데, 실제로는 좀비 영화의 모태가 된 조지 A 로메로의 '좀비 3부작'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1968) <시체들의 새벽>(1978) <죽음의 날>(1985)에 이르러서야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좀비의 거의 모든 것이 완성된다. 알듯 말 듯 한 이유로 께어난 시체들, 어기적 어기적 움직이며 탐욕스럽게 인육을 찾아 헤매는 좀비들, 좀비에게 물리면 다시 좀비가 되는 사람들, 사랑하는 이가 좀비가 되었을 때의 슬픔과 두려움 그리고 바이러스처럼 증식하며 다가오는 종말의 공포, 매스미디어와 세상의 소위 “트렌드”에 중독돼 주체적인 사고력을 잃은 현대인에 대한 은유, 좀비보다도 야비하고 잔인한 인간에 대한 절망 등등 좀비의 모든 것이 '좀비 3부작'에담겨 있다. 이렇듯 ‘좀비물’은 20세기가 되어서 만들어 낸 최신의 현대 주류 장르라 할 수 있다. 하드고어적인 식육의 작면이나 구토와 오심을 유발하는 좀비들의 외모, 그리고 지각과 감정이라고는 없이 그저 단순한 욕구에 의해 이리저리 ‘떼’를지어 다니는 좀비들의 모습으로 장르적인 메시지 전달의 주된 방법은 ‘풍자’ 일 것이다. 인간을 풍자하고 그 인간들이 구성하고 있는 사회와 세상을 풍자하며, 그것을 목도하는 제3인척 하는 관객들의 이중적인 생각들을 풍자하는 것이다.
좀비 영화에서 시체들이 깨어나고, 좀비에게 물리면 다시 좀비가 되는 악순환 속에서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의 모습은 끔찍한 공포이다. 개인적인 공포 호러물이 아닌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공포물에는 ‘재난영화’들이 자리 잡고 있다. 사회적 공포는 '아포칼립스'라는 이세상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공포'로 대변하며 이야기한다. 이러한 공포에 대한 경험과 포커스가 이전의 공포영화에서 바뀌고 있는 증거가 ‘좀비물’의 창궐이다. <인디펜던스 데이>, <월드워> 등 ‘외계로 부터의 침공’이 말해주는 ‘외부로 부터의 공포’에서‘내부로 부터의 공포’로 이동된 것을 의미하기도 하다. 이전 드라큘라나 뱀파이어물부터 몬스터가 등장하는 공포물도 ‘외부로부터의 위협’이 공포로 작용한다. 평온한 사회를 위협하는 것은 ‘;공산주의’나 ‘파시즘’ 같은 외부의 공포 대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좀비는 죽음이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에서나 시작된다. 좀비에게 물리지 않아도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때문에 내 옆의 가족과 이웃이 좀비가 될 수도 있다. 내 가족이고 이웃이었던 사람들은 좀비가 되면 어떠한 대화도 가능해지지 않게 된다. 대화가 불가능한 비이성적 비감성적 존재가 되어 버린다. 아무런 교감도 없이 살아 있는 사람의 살점만을 탐욕하는 잔인한 좀비들은 어떤 무엇으로 막아 내기 힘들다. 십자가나 은총알, 마늘도 소용없고 독실한 퇴마 사제의 기도도 소용없으며, 머리를 조준하지 않는 한 인간의 무기도 무용지물일 뿐이다. 막 다른 곳에 몰리면 방법은 둘 중 하나이다. 좀비가 되던지 자신의 머리통을 스스로 날려 버리던지.
왜 지금, 오늘 ‘좀비’인가?
심리학자 메슬로우는 인간의 욕구를 다섯 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피라미드 모양의 바닥의 욕구부터 그 위로 상향할수록 가치를 부여하는 욕구들로 이루어져 있다 설명한다. 가장 첫 번째 욕구는 ‘생리적 욕구’이고, 2단계가 ‘안전의 욕구’, 3단계가 ‘소속, 애정의 욕구, 4단계‘존경의 욕구’,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아실현의 욕구’로 구분되며, 하위의 욕구가 충족돼야 상위의 욕구가 실현 가능해진다는 이론이다. ‘좀비 영화’에서는 하위의 두 가지 욕구만이 남게 된다. 신선한 살점을 찾아 물어뜯어 먹어야겠다는 욕구와 그에 반해 좀 잡을 수 없는 이 위협들로부터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가는 두 가지 욕구가 충돌하며 이야기를 끌어낸다. 겉으로는 그럴듯한 자아실현과 존경에 대한 갈망을 표출하는 인간의 군상들이지만 실제로 처연한 바닥의 상황에서 라면 그저 두 개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극도록 이기적이 되고 선과 악의 경계를 마음대로 무너뜨리는 것이다.
영화 <부산행>은 이러한 좀비 영화의 전형적인 코드들을 담아내고 있다. 각자의 삶의 모습으로 다양한 군상으로 기차에 오르는이 들이지만, 바이러스가 퍼지고 감염자가 생기면서 이들의 목적은 단순하게 이분되어 버린다. 아직 감염되지 않은 자를 물어뜯거나, 감염된 좀비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해서 안전한 피난처로 도달하는 것, 이 두 가지 이외에는 어떠한 욕구도 개입하기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좀비물에서는 복잡한 심리적인 교착이나 애정의 전선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각자의 삶의 모습을 살짝살짝 보여 주면서 다양한 군상들이 결국은 이 본능적인 모습으로 귀결된다고 무뚝뚝하게 말할 뿐이다. 부산행 KTX에 탄 사람들은 처음에 부산으로 향하는 목적은 다양하였을 것이다. 딸의 생일을 위해 사이좋지 않은 아내에게 찾아가는 사람부터, 출산을 위해 고향을 가는 사람, 모처럼 휴식을 위해 여행을 가고 사업을 위해 출장을 가는 사람들로 다양하게 기차 안을 메우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이러스의 감염으로 좀비와의 사투가 시작되는 시점부터는 이들에게 이전의 목적은 소멸되어 버린다. 그저 생존하거나 생리적으로 욕구를 채우거나 두 가지의 이유만 남게 된다. 그들이 가는 곳이 부산이던 대전이던 중요하지 않다.
좀비 영화에서 좀비나 살아남은 생존자나 이러한 본초적인 ‘욕구’를 드러내게 되고 이 욕구를 이루기 위한 과정 속에서 사건들과 대치가 일어나게 된다. 생존자들은 어디에 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어디인가에 있을 ‘안식처’와 ‘치료법’을 찾고자 한다. <나는 전설이다>에서 주인공이 AM방송을 틀며 생존자를 찾고 다른 생존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도 이러함이고, <레지던트 이블>에서 생존자들이 모여든 바다 위의 큰 요새도 이러한 목적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감염된 좀비들은 스스로의 욕구는 아니지만 바아러스나 숙주가 요구하는대로 남은 생존자를 감염시키며 인류의 마지막 한 사람까지 찾아 물어 버리고자 개떼처럼 몰려다니기 일쑤이다. 문제는 살아남은 생존자나 감염된 좀비나 그들이 가고자 하는 곳에 진짜 그들이 원하는 것이 있을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될 수도 있고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부산”이라는 일상의 목적지는 절대절명의 위기 속에서 생존의 목표가 되어 버린다. 그곳이 안전할지 나를 받아 줄지 알 수는 없다. 그저 이성도 감성도 없이 나를 물어뜯기 위해 달려드는 좀비만 되지 않는다면 지구 끝 어디라도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존한 사람이나 이미 죽어 깨어 난 좀비나 지금의 삶은 고단하고 답답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있을 것이 없는 아쉬운 <부산행>
잔인하기만 하고 결말마저 찝찝하기에 비주류 공포영화로만 작은 극장이나 비디오 샵에만 걸려 있던 좀비 영화가 21세기 들어 대중적인 장르로 부상하게 된 것은 대니 보일의 <28일 후(2002)> 이후가 아닐까 싶다. 초자연적인 설정이 아닌 인간의 인위적인 ‘바이러스(분노 바이러스)’로 인해 사람들이 좀비로 변하는 ’ 28 시리즈’는 대중적으로 상업영화의 주류에 올려놓게 되었다. 이후 <시체들의 새벽>을 리메이크한 <새벽의 저주(2004)>가 반향을 일으켰고, 이후 <나는 전설이다>, <레지던트 이블>, 그리고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월드워 Z(2013)>을 통해 좀비 영화는 ‘블록버스터’의 공식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트화는 성패에 있어서 두 가지의 전제조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금융공학의 정작용이 가능한 할리우드 영화처럼 막강한 물량의 투입으로 스케일을 잡아 버리던지, 아니면 긴 호흡을 가지고 큰 줄기의 이야기에서 많은 관점을 파생시킬 수 있는 소위 ‘드라마투루키’가 튼튼해야 한다.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야기나 게임을 기반으로 긴 호흡의 시리즈를 기획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관점에서 <부산행> 은 사실상 실패작이라 말하고 싶다.
우선 <부산행> 에는 세상에 대한 풍자가 희미하다. 이기적인 펀드매니저를 직업으로 가진 주인공을 설정하고, 영화 안에서의 전형적인 악역을 담당하는 용석(김의성)의 모습이나, 간혹 나오는 등장인물의 내레이션 같은 대사가 이 시대와 사회를 이야기하는 것은 맞다. 그리고 바이러스가 창궐한 현실에서 국민들에게 ‘안정’만을 당부하는 정부의 미디어 발표에서 그러한 것을 전해주고 있다. 하지만, 생과 사라는 극한 갈림길 위에서 등장인물들은 너무나도 평면적이다. 누구 하나 입체적으로 작용하거나 찝찝하게 뒤통수를 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 세상은 그러하지 않음에도 말이다. 더욱이 감독의 전작인 <돼지의 왕>, <사이비>를 충격적으로 본 나로서는 배신감마저 지우기 힘들었다.
그리고 <부산행> 에는 좀비다운 좀비가 없다. 우리가 흔히 시쳇말로 ‘좀비 같은 삶’이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자신만의 확고한 생각이나 목적이 없이 그저 ‘살기 위해 사는’ 우리들의 모습을 빗대어하는 이야기다. 이 세상에서의 좀비 같은 우리들의 모습은 ‘어기적’ 그리고 ‘의욕 없음’으로 대변된다. 원래 좀비 영화에서 좀비의 모습은 불편한 관절꺾기와 어기적 거리는 느려 터진 행동이 트레이드마크였다. 그럴 것이 좀비는 본연 ‘시체’이기 때문이다. 한 번 죽고 나서 어떤 이유에서든지 기본적인 욕구만 발휘된 채 몸을 다시 세우게 된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사후 경직이 오고 부패가 시작된 좀비들의 걸음은 어기적 거리기 일쑤이고 느려 터질 수밖에 없다. 물론 초창기 좀비 영화가 저예산 B급 무비였기에, 동네 주민이나 아마추어 배우를 좀비로 사용하다 보니 동작이 어색하고 굼떴다는 분석도 있지만, 좀비는 본래 느려 터진 존재이다. 역설적으로 느려 터졌기에 그들은 무섭다. 느려 터진 그들이 이성의 각성 없이 살 냄새를 맡아 떼를 지어 느릿느릿 다가오는 모습은 사실 무척 공포스럽다. 갑자기 나타나는 번개돌이 유령보다 무서움은 배가되고 그들의 지치지 않은 느릿한 다가옴은 이내 도주를 포기하게 만들기도 한다. 물론 <28일 후> 이후 상업영화의 장르로 편입이 되면서 화려한 편집에 후반 작업 그리고, 러닝타임 내내 몰라 붙여야 하는 블록버스터의 공식을 내재하면서 좀비들이 무척 빨라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좀비 같은 삶’은 알아차릴 만큼 ‘번쩍’하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부지불식간에 나를 물들이는 무력감, 원하지 않지만 어느새 99% 비주류에 속해 버린 내 모습을 어느 날 문뜩 발견하면서 삶이 공포스러워 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부산행>에는 ‘낯설음’이 없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드라마적 구성, 소설이나 연극, 영화에서 ‘낯설게 하기’는 무척이나 유용한 도구이다. 쉽게 말해 ‘뻔하게’ 유추되는 이야기들은 매력을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많은 관객이 쉽게 이해해야 하고, 때로는 그 관객들의 눈높이에서 이야기의 구조와 결말을 타협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드라마를 채워가는 배우들의 역량의 한계도 분명하게 이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안타까운 것이다. 이 영화평의 제목 “있을 것이 없는 신파극”은 2011년 개봉한 <고지전>을 보고 썼던 글의 제목이기도 하다. 차세대 김기덕으로 주목받던 장훈 감독의 <고지전>을 보고 당혹감과 실망감으로 썼던 글이었다. 그 글 마지막에 이러한 이야기를 풀어내었다.
“열심히 한 것과 잘 한 것은 매우 차이가 나는 이야기이다. 열심히 하는 일은 잘 못된 일이거나 이치에 맞지 않은 일일 수 있다. 장훈 감독의 촘촘한 작품 발표(영화는 영화다, 의형제)의 폐해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작품의 중반부터는 답답함과 내려가지 않은 체증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뒷 힘이 없는 연출이고 중심을 잃은 편집이었다. 근본적인 이유가 감독의 역량에 대한 이야기라고 묻는 다면, 그렇다고는 확답하지 않겠다. 그는 이미 여러 영화 활동으로 인정받는 연출가이기에 그러한 평가는 무의미하다. 신인 대열에 있는 감독에게 슬럼프라는 말도 가혹하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일까? 문제는 이영화가 쇼박스라는 대형 제작배급사에서 기획한 130억 이상 투입된 ‘금전적 대작’ 즉 블록버스터 영화라는 입장을 초기부터 포지션 하였다는 점이다. 물론 CJ에 밀려 그 힘이 미약해졌다고 할 수는 있지만 배급과 스크린을 다수 직접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쇼박스 배급사에서 주도한 기획물의 시작은 이미 정해진 것이다. 필요한 시점에 납기 지키듯 걸어야 했을 것이고, 그들의 이전 흥행작의 마케팅적 레퍼런스라는 것을 그대로 리플리케이션하라고 은연중에 아니면 대 놓고 주문받았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배급사가 보는 영화는 문화예술적 창작물이라기보다, 재화를 만들어내는 상품이기에 그러하다. 그리고 소수의 스크린에서, 작가적 치열함만을 가지고 정면 승부하는 사형-사제-사부의 영화들과 경쟁하여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감도 대단했을지도 모른다. 혹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진실이 어떠하든 그 부담감은 장훈 감독의 가슴에 남아 있을 것이다.”
연상호 감독의 속마음을 읽을 수는 없으나 기시감이 든 것은 사실이었다. 박찬욱, 봉준호 감독이 작품 대박 이후에도 작은 옴니버스에 참여하며 자신의 ‘작가정신’의 심지를 살려 놓는 것을 보았으면 한다. 다음 그의 작품에는 진짜 ‘좀비 같은 좀비’를 만나기를 기대해 본다.
차라리 좀비라면 좋을 세상
세상이 참 묘하게 꼬여 있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상식마저 희미해져 있다. 하지만, 세상의 1% 라고 자부하는 인간들은 나머지 99%를 ‘개, 돼지’로 보는 것은 분명하다. ‘부패한 대통령’으로 꼬리표를 달아 바위산에서 뛰어내리게 만들었던 그들은 자신이 썩어 문드러진 것을 감추려고 하지도 않고 있다. 독립 사법기관 검찰의 수장을 지낸 사람들은 기업의 돈은 내 돈처럼 사용하고, 공직을 위한 기본적인 신고의 의무도 가볍게 제쳐 버린다. 이를 보고 이나라 수장이라는 대통령은 ‘고난을 이기라며’ 그들의 무고함을 대변하고 있다. 권력 위에 있다는 금력의 대명사인 이나라 최고의 재벌기업 수장은 적지 않은 나이에도 자신의 빤스 속을 주체하지 못해 세상에 속살을 드러 내고 말았다. 이뿐인가 이러저러한 자극적인 일들로 묻혀 버린 수많은 부정과 부패들. 이것은 비단 고위직 공무원이나 권력의 핵심에 있는 사람들, 혹은 재벌 총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보고 사람들은 처음에는 손가락 질 하고 야유를 퍼붓고 분개한다. 그리고 그들과 다르다며 선을 긋고 나의 영역으로 애써 달음질한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고 삶은 고단하고, 천천히다가 오는 좀비 같은 그들의 호화롭고 평온해 보이는 삶을 동경하게 된다. 윤리와 양심이 뭐가 대수라며 그저 잘 먹고 잘 사는 게 장땡이라 합리화한다. 작은 사업을 하면서 법인 비용을 내 돈처럼 쓴다. 쓰지 않는 사람이 바보라며, 기업은 수십억 적자지만 자신은 호화로운 집에 렌터카, 아이들은 모두 기천만원 하는 국제학교로 보낸다. 매일 아등바등 깨끗한 척 달리다 지쳐 버리느니 차라리 저들에게 물려 동화되는 편이 나아 보인다. 그저 눈질끈 감고 한번 물리면 될 것이니까. 양심의 가책으로 가슴 한 번 따끔 거리면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리고서는 그들과 같이 썩은 내를 내면서 아직 물리지 않은 저들을 구석으로 몰아가기 시작한다. 천천히 떼로 몰려들어 그들의 맨살을 물어뜯어야 하니까 말이다.
“왜 그리 아등바등 살았어? 남들 먼저 다 퍼주고 살다가, 자신은 못 챙기고, 어차피 저렇게 될 것을.”
자매 지간처럼 정겨웠던 두 할머니 중 하나가 좀비가 되자, 그 모습을 보고 나머지 한 사람이 타박 조로 울먹인다. 어쩌면, 살아남는 것보다 물려 좀비가 되는 것이 속 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누가 알아준다고 세상의 기준을 생각하며 살아남으려 했던가? 차라리 나도 저 좀비들처럼 그저 단순하게 내 욕구만을 위해 사는 그런 존재라면 세상살이가 이렇게 아프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생각을 다시 잡아 보았다. 그렇게 사는 것이 사는 것인가? 좀비로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닐 것이다. 날마다 뜬 눈으로 지새우며 물리지 않으려 힘든 밤을 보내고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치유와 안식이 있는 그곳으로 힘겹게 한 발짝씩 간다 해도 그렇게 가기로 한다. 왜냐면, 그게 산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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