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흥부: 글로 세상을 바꾼 자>는 누구에게나 익숙한 고전이자 전래하는 이야기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여기에 상상의 전제를 달아 생각 깊은 지점을 던져 준다. 흥부전의 모티브가 사실 역모를 꿈꾸는 두 형제의 결이 다른 삶에서 시작하였다는 극적 상상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 된다. 그 극적 상상에서 영화는 ‘꿈’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모습을 말한다. 영화가 말하는 꿈에 대해서 자꾸 생각이 들게 했다. 꿈이라는 단어는 생각보다 일상에서 자주 듣고 말하는 단어다. 익숙하고 흔한 말일수록 그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는 새로운 의미를 줄 때가 있다. 사전을 열어 보았다.
꿈
1. 잠자는 동안에 깨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사물을 보고 듣는 정신 현상.
2.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
3. 실현될 가능성이 아주 작거나 전혀 없는 헛된 기대나 생각.
사전적인 의미는 무언가 새로운 깨우침을 주기에는 평이하다. 다만 두 번째, 세 번째 뜻풀이를 보고 있자면, 꿈을 해석하는 입장과 상황에 따라 정반대로 규정지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강력하게 이루고 싶은 소망을 꿈이라고도 말하며, 그 꿈을 이루라 응원하고 지지하곤 한다. 반대로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이고 현실감을 잊은 듯한 모습을 추궁하며 꿈을 깨라고 충고하고 지적한다. 이런 이유에서 어떤 이의 꿈은 누군가에겐 간절한 소망이기도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한낮 공상과 망상에 지나지 않은 헛소리로 들리기 마련이다.
"꿈을 꾸는 게 죄야."
영화에서도 권력을 가진 이들은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는 것 자체가 죄라는 이야기이고, 감히 이루어서는 안 되는 일들을 꿈꾸는 상상만으로도 죄를 범한다는 이야기다. 이 백여 년 전 조선 땅 어디가 배경인 영화가 오래된 옛날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우리의 일상은 매일 꿈을 꾸고, 그 꿈을 깨는 시간으로 채워져 가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세상은 꿈을 꾸는 사람과 그 꿈을 깨는 사람들로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다.
몇 해 전 화력발전소에서 안타깝게 생명을 잃은 청년의 꿈은 '멋진 양복을 입고 출근하는 정규직'이었다. 그가 남긴 첫 출근 전날의 사진을 보면 그 마음이 고스란히 읽힌다. 비록 양복이라곤 입어 볼 새도 없는 기름때 투성이의 작업복과 번듯한 자기 책상 대신 무섭게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가 그의 근무지였지만, 그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의 실현 가능성을 평가하기 전에 그의 꿈을 폄훼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세상의 모든 사안을 볼 때 거창한 것은 아니고, 헛된 희망도 아니니까요. 혹자들은 이야기한다. 좀 더 노력해서 좋은 직장을 갈 수 있는 스펙을 쌓지 못한 개인의 선택이 아니냐고 말이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직업의 선택과 합당한 보수의 급여는 개인의 노력에 따른 보상으로 이루어진다. 다만 단서가 있다. 세상이 공명정대할 때 작동하는 이야기다.
사회의 양극화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가 쏟아진다. 양극화의 표면적이고 직접적인 이유는 '돈'과 '자본'이다. 그런데 말이다. 그 돈과 자본이라는 것이 태어날 때부터 총량이 정해진 사회라는 것이 문제가 된다. 양극화의 시작이 여기에서 비롯한다. 세상의 재화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인데, 잠시 점유하는 개인이 '소유'의 이름으로 독식하려 한다. 그 독식된 자본 권력은 대를 이어 세습한다. 그 자본은 시장 논리라는 명제 위에 올라타 스스로 당위를 부여하며 합리화한다. 자본의 격차는 교육의 격차를 낳고 교육의 격차는 다시 자본의 격차를 늘린다. 누군가 꾸는 꿈은 자본의 시각에서 '허튼 생각'에 지나지 않은 세상이 되어 버렸다.
'최저임금'과 '정규직 전환'에 대한 이야기도 또한 무수하다. 인상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사업자와 기업, 즉 고용자의 어려움이 증가하여 경제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다. 원론적인 이야기에서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임금구조가 어찌 되었는지를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인구 500만 명 이상이 '최저임금' 기준 대상자에 있다고 한다. 경제 활동 인구 중에 상당 비율이 '최저임금' 수준의 급여로 일상을 이끌어 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많은 기업가는 주장한다. 기본급여일 뿐이고 상여, 수당, 복지혜택 등을 고려하면 그 갑절이 된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그것은 '통상임금'을 줄이려고 기본급여를 낮게 책정하는 세상에서 보기 힘든 기이한 급여 산정에 그 이유가 있다. 통상임금 비율을 올리면 최저임금 부담은 자연스럽게 줄어들게 되어 있다. 하지만, 그렇게 주기가 싫을 것입니다. 퇴직금 부담에 기타 보장 보험 부담이 온다는 논리를 들이댄다. 그 생각의 기저에는 '이 회사는 내 것이야'라는 생각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화를 생산하는 자본을 점유한 사람은 자본의 투여만큼의 이득을 취득해야 한다는 논리다. 이런 논리라면, 기업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저 금융상품에 투자하면 된다. 기업에서 취득하는 이익 창출의 주체는 자본투자자도 있지만 종사하는 임직원도 주요한 구성원이기 때문이고, 소비자와 잠재적 소비자, 그리고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사람이 그 재화에 대한 공유를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장'이라는 경제에 참여한 모두는 그 시장과 창출한 재화를 나눌 의무가 있다.
영어 Dream의 어원을 찾아보았더니 이런 유례가 있다. 영어 dream (sequence of sensations passing through a sleeping person's mind)은 원시 게르만어 draugmas (deception, illusion, phantasm)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정확한 어원을 찾기 위하여 유라시아어의 공통 조상어인 르완다어를 살펴보면, 르완다어 TRA는 살다 (to live at, dwell at)의 뜻이고, uka는 분출하다 (to spray, sprinkle, squirt)의 뜻이며, masa는 송아지 (calf, bullock)의 뜻이다. 원시 게르만어 draugmas는 르완다어 <tura + uka + masa>로서 송아지가 분출하는 들을 의미한다.
정리하자면, 영어 dream은 르완다어 <tura + uka + masa>에서 기원한 것으로서, ‘송아지가 가득히 돌아다니는 들(field)’을 뜻하는 것으로서 오랜 인류의 꿈같은 희망과 기원을 의미한다. 원시인들의 꿈은 많은 송아지를 잡거나 사육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들판에 송아지들이 가득 돌아다니길 희망한 것이다. 나의 소득의 증대가 아니라 이 세상 모두가 풍요하길 바라는 것이 꿈이었다. '우리 모두'의 이익이 최대가 될 때 꿈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소위 '대박' 터진다는 말은 아마도 흥부전에서 유래한 말이 아닌가 싶다. 흥부가 박을 타며 생각한 꿈이 로또 같은 대박의 결과로 이어지는 기적은 그저 옛날이야기에만 있는 정말 '꿈' 같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꿈은 누구나 꿀 수 있다. 그리고 꿈을 꾸는 것이 죄가 될 수 없다. 모두가 잘 사는 꿈에 대한 이야기가 시장경제를 해치는 좌익 빨갱이의 사회주의적 이념의 발로로 치부되어선 안 된다. 최저임금과 정규직의 문제를 접하면서'냐면', '내 가족이라면', '내 자식이라면'이라는 시각의 전환이 필요한 때다. 경제 논리 정치 논리가 필요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두'가 잘 살면 당연히 '나'도 잘살게 됩니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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