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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읽기

[영화리뷰: 미드소마 (2019, Midsommar)] 낯설은 두려움, 두려운 낯설음

by 박 스테72 2020. 2. 19.

 

 

크리스티안(잭 레이너)은 인류학과 박사 과정 논문을 준비 중이다. 같은 과정의 조시(윌리엄 잭슨 하퍼)와 남성 우월주의적인 마크(윌 폴터)와 함께 스웨덴 교환 학생인 펠레(빌헤름 블론그렌)의 선조들이 살던 스칸디나비아 외딴곳에 초대되면서 여름휴가 겸 논문 조사 여행을 하게 된다. 엄청난 가족의 비극을 겪고 난 후 상실감에 빠진 여자 친구 대니(플로렌스 퓨)도 함께 동행하게 된다. 그들이 방문하는 ‘헬싱글란드(Hälsingland)’에 사는 호르가 사람들은 90년마다 한 번씩 미드소마 축제를 열고 정화 의식을 행하는데, 그 축제의 백미는 축제에 참여한 모든 여성들이 참여하는 '5월의 여왕'을 뽑는 경연이다. 여러 불길한 예감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목적을 위해 헬싱그란드 외딴 마을에 찾아든 여섯 친구들은 저마다 기묘한 낯섦을 경험하게 되는데. 크리스티안은 자신의 논문 주제를 위한 영감을 얻고, 대니는 상실한 마음을 새로운 공동체에서 위로받을 수 있을까? 아니면 이처럼 낯선 환경에서 알 수 없는 두려움은 현실로 그들을 위협할까?

 

 

낯선 공포 영화 <미드소마>

영화 <미드소마>는 참 낯선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대니 일행이 방문한 호르가 마을은 목가적으로 나무가 늘어선 능선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광활한 들판 위에 합숙소와 부엌, 사원 등은 현대사회에서나 그간 익숙한 서구 문화에서 보기 힘든 투박한 목조 건물들로 드문 드문 세워져 있다. 조상 대대로 씨족 사회 같은 공동체 형태로 모여 사는 모습도 현재의 시점에서 낯설기만 하다. 축제를 벌이는 마을 사람들도 여간 생소해 보인다. 저마다의 고대 북유럽의 상징이 있는 흰색 리넨 맞춤옷은 물론이고 60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축제의 상징물인 꽃기둥 ‘메이폴’을 세워 춤을 추는 모습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중에서 가장 낯선 것은 하루 종일 해가 꺼지지 않는 밤낮의 경계가 사라지는 '백야'의 모습이다. 어둠과 음침함이 깃들지 않는 백주 대낮 같은 배경이 러닝타임 내내 펼쳐지는데, 영화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가득하니, 우리가 생각하는 "공포영화"나 "호러영화", "오컬트 영화"와 화면의 밝기부터 남다르다. 이렇게 영화 <미드소마>는 낯선 것으로 가득 찬 배경과 소재로 새로운 공포와 두려움을 던져 준다. 그것이 낯설어서 두려운 것인지 공포스러워서 낯선 것인지는 가늠되기 쉽지 않아도 말이다.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게 될까? 예전 비디오 시대에 대여한 비디오 앞부분에 자리 잡은 불법 비디오 근절 캠페인에 나온 호환, 마마, 전쟁일까? 아니면 귀신? 개? 메르스? 코로나19? 아니면 신용카드 청구서나 늦은 귀가에 버티고 기다리는 배우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사람이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는 대상은 개인적인 경험과 인식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커다란 개에게 쫓겨 보거나 물려 본 사람이 개에게 공포나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경험한 고통의 기억과 그로 인해 생존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그러나 신종 전염병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처럼 경험하지 않고도 사회 전체가 두려움에 휩싸이는 경우도 있다. 예측할 수 없고, 대응할 방법이 마뜩지 않다는 것이 불안과 공포의 실체다. ‘예 것이 불안과 공포의 실체다. ‘예측할 수 없음’은 우리 인간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 ‘대처할 수 없음’을 의미하고 흔하디 흔한 확률조차 붙여 쓸 수 없기에 인해 두려움은 극대화된다. 우리네 인간에게 통제와 예측 가능성의 부재는 강력한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고 그 스트레스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두려운 낯설음(Das Unheimliche)

정신분석학의 거장 프로이트는 1919년 섬뜩함에 대한 에세이 [두려운 낯설음]을 썼다. 두려운 낯설음이란 감추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 표면에 나타나게 되는 데에서 오는 불안과 공포를 말한다고 한다. 프로이트의 문장과 책이 같은 줄을 여러 번 읽게 만드는 어려움으로 유명하기에 이 책과 이론에 대해서 장황하게 이야기할 생각은 없지만, 쉽게 설명하자면 이런 이야기다. 사람들은 실제 경험이든 지적 경험이든 대부분 '예감'과 '예상'을 하게 되고, 이 예감이라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실현된다고 확신하게 되는데, 이러한 확신으로 자신의 정신을 통제하고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섬뜩한 낯설음은 '두려움'과 '공포'의 감정이 되고 이런 감정이 통제 불능이 되면, 소위 말하는 '멘붕'이 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낯설음은 보통 '경험'된 무서움과 공포라기보다는 인간의 '욕망'과 '믿음'과 관련되었다 말한다. 그 '대부분' 일어나는 일이 일어나지 않거나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는 경우 경우의 생소함이 두려움의 원천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두려운 낯설음의 감정을 자아내는 사례들을 연구하면서 우리는 고대인들의 세계관이었던 정령 사상(Animismus)에 다다른 것이다. 이 정령 사상의 특징은 인간의 형상을 한 영혼들로 세상이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데 있다. 이는 곧 정신 작용의 우월성, 즉 생각의 전능성을 과대평가하는 것이기도 했고 이러한 생각을 기본으로 한 마술의 기교에 대한 신봉을 뜻하기도 했다. 치밀하게 위계질서가 잡혀 있는 각종의 인간적 덕목과 악덕은 인간과 사물의 형상을 한 존재들에게 부여되어 있다. 정령 사상의 또 다른 특징은 고대인들의 무한한 나르시시즘이 모든 허구적인 창조 속에 숨어 있을 수 있었다는 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출처] 두려운 낯설음(The Uncanny)(2/3)|작성자 SonKJ

‘미드소마’는 지금까지 통틀어 가장 밝은 공포영화라 일컬어진다. 신체적이고 물리적인 억압과 고통이 아닌, 심리적이고 감정적인 부분에 집중해 공포를 느끼게 하는 영화다. 무엇보다 아리 애스터 감독은 큰 상실감은 안은 연인이 비밀스러운 스웨덴의 한 마을에서 한여름 낮이 가장 긴 날 열리는 하지 축제에 참석해 기이한 경험을 겪고 점점 공포에 빠져들게 되는 이야기를 자신만의 문법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일반적인 공포영화의 공식에서 벗어나 시종일관 목가적인 분위기에 밝고 아름다운 배경 안에서 낯설지만 두려움이 극대화된 대낮 공포를 선보인다. 감독은 성대하게 벌어지는 ‘하지 축제’라는 종말론적 의식을 통해 새로운 공포감과 그 안에 내재된 카타르시스를 보여 준다. 개인적으로 공동체를 잃어버린 상실감 가득한 대니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 신화, 정령적 메시지가 가득한 매혹적이지만 생경하고 매우 새로운 세계를 철저하게 그려냈다. 또한 외로움과 슬픔으로 가득했던 대니가 새로운 문화 속에서 또 다른 공동체를 만나게 되고 그 안에서 이전 공동체에서는 지닐 수 없었던 새로운 위세와 권력을 맛보게 된다는 것도 무척 새롭다.

 

 

호르가 마을의 사람들은 물론 음식 및 의식, 예식마저도 생소하다 못해 기이하기까지 하다. 마을 사람들은 18년 주기의 '생애주기'를 철저하게 믿고 그 주기에 따른 삶을 이행한다. 그들은 삶을 계절로 생각하는데, 자라나고 성장하는 18세까지는 봄, 순례를 떠나는 18세에서 36세까지는 여름, 일하는 나이인 36세에서 54세까지는 가을, 삶의 멘토가 되는 54세에서 72세까지는 겨울이라는 생애주기를 철저하게 믿고 실행한다. 72세 이후에는 호르가 마을의 전통에 따라 반드시 특별한 의식을 치러야 한다. 이 의식은 일반적인 인식으론 상상할 수도 없는 엽기적인 상황이지만, 이들에게는 성스러운 의식(liturgia)이 된다. 호르가 마을의 전통 의식들이 진행되면서 처음에는 그 생소함에 거부감 마저 든다. 하지만 그 예식이 집요한 강요나 억지가 없이 길고 차분한 호흡으로 진행되기에 이내 영화를 보는 사람들도 동조하고 인정하게 된다. 아마 '두려움'과 '공포'의 원인은 생소한 환경이나 의식, 그리고 생경한 사건들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고 마주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공포영화 <미드소마>의 진정한 악역은 호르가 마을 사람들이 아닐 수도 있다. 오랫동안 이어져 온 동일한 의식을 행하는 마을 사람들이 아니라 그 엽기적이고 상식으로 용납되지 않는 일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그들의 생각과 가치관, 풍습이다. 이러한 생각과 가치관은 영화가 종국에 다다르면서 대니 안에 새롭게 자리 잡게 된다. 대니는 이러한 사건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받아들임에 의해서 권력을 얻고 변화한다. 이 지점에서 관객은 영화에 독특한 공포의 힘을 느낄 수 있게 된다.낯선 두려움이 익숙한 습관이 되는 순간 세상은 공포로 휩싸이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낯설게 하기로 얻어진 공포의 사회학

최근 중국 우한에서 발생했다는 신종 독감 '코로나19'로 온 세상이 떠들썩하다. 요란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은 공포와 두려움에 미디어와 뉴스를 주목한다. 혹여나 하는 마음에 사람이 모여드는 공간이나 적극적인 접촉은 멀리하는 것이 미덕이 되었다. 감기는 열, 기침, 통증, 콧물의 증상을 동반하고, 충분한 휴식과 균형 잡힌 음식 섭취, 그리고 약물 복용으로 나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감기를 앓고 나아진 것을 '치료'로 혼동해서는 안된다. 가장 적합한 표현은 '회복'일지도 모른다. '코로나19'가 요란하고 떠들썩 하지만, 실체를 들여다본다면 '독한 감기'의 범주에 들어간다. 현재 통계 상으로도 2.5% 내외의 치사율을 보이며, 흔한 '계절 독감(Seasonable Iflu)'의 치사율의 평균에 수렴하고 있다. 그 통계도 집중되고 응축적인 관리 시스템의 통계이기에 다소 보수적으로 높은 비율이 나타난다는 것은 비밀 아닌 비밀이다. 다시 말하자면 메르스나 기타 중증 전염병의 범주에 넣을 정도의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리도 공포와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일까?

 

 

수년 전에 중동지방에서 유래된 메르스는 많은 사람들을 위중하게 만들고 생명마저 위협하였다. 메르스는 열, 기침, 통증, 가래를 동반하고 유전자 검사를 통해 확진, 격리병동에서 치료한다. 증상은 비슷하나 감기에 걸린 사람은 충분히 통제와 예측, 그리고 적응하여 일상생활에 별 지장이 없다. 반면 메르스는 우리의 예측과 통제의 범위를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극도로 공포스럽고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그 여파로 지금의 '코로나19'도 그 영향권에 의한 과대 반응이라 생각이 된다. 물론 사람의 고통에 경중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팩트와 예측은 구분하여 생각하는 것이 여러모로 건강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정확하고 냉정한 통제와 예측 가능성은 매우 중요한 사안이 되었다.

우리는 일상을 살아간다. 일상의 미덕이자 수렁은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은' 항상성에 있다. 일정한 시간에 정해진 일과를 보내고 익숙한 사람과 환경에서 생활하고 하루를 마감한다. 가끔 예정에 없던 출장이나 회의, 또는 업무 등이 다가올 때 조금 긴장되기는 하지만, 곧 익숙해지고 적응된다. 있을 법한 상황은 경험하고 보유하고 있는 정보를 토대로 대처가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에 정보가 충분하지 않거나 그 정보가 생경하거나 낯선 것일 때는 자신감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두려움과 공포마저 느끼게 마련이다.

두려움과 불안은 이처럼 '정보 없음'에 기인한 예측과 통제의 실패에서 시작된다. 출처나 정보원을 규명할 수 없는 가짜 정보까지 넘실대다 보면 '멘붕'에 빠지기 십상이다. '믿을 놈 하나 없네'하는 말이 절로 나오니 말이다. 이런 정보와 통제의 부재로 인한 혼란을 적절히 이용하고 활용하는 세력도 있으니 이 세상은 참 살아가기 '공포'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두려운 낯설음에 대한 백신 : 신뢰라는 사회적 면역력

“<미드소마>를 상호 의존 관계를 다룬 공포영화라고 생각했다”

영화에서 대니가 불편한 동행을 하게 되고 이야기는 이 불편한 관계로부터 파생된다. ‘이렇게 위태 위태한 관계가 어떠한 결말을 이루게 될지’에 관한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다. 이미 끝내던지 새로이 갱신해야 했던 두 사람의 위험한 관계에 대해 감독은 낯선 두려움과 공포로 채워 가며 답을 구한다. 영화는 대니와 크리스티안의 관계나 친구들의 관계 등 다양한 관계가 흐트러지면서 깊은 갈등이 이어진다. 그리고 감독은 낯선 두려움과 공포의 극복은 '관계의 회복'에서 가능할 것이라 말하고 싶지만, 영화는 모두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만약 그들의 관계를 조금이라도 회복했다면 종국의 비참한 결말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말하곤 한다. 친숙하지 않는 상황이더라도, 또 이내 적응하고 살아간다. 새로운 곳으로 가게 되면 처음에는 낯선 사람, 장소에 약간 긴장을 하지만, 조금씩 사람과 장소를 알아가고 그곳에 적응되어 간다. 낯섦에 대한 면역력이 생기는 것이다. 질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생물학적인 면역력이 생긴다. 그리고 개인의 면역력도 중요하지만, 더욱 필요한 것은 사회적 면역력일 수도 있다. 사회적 면역력이란 믿을 수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사회 구성원 간의 신뢰에서 생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무조건적인 믿음이나 안정의 강요나 정보의 은폐는 사회적 불신과 불안의 심화를 조장한다. 그러나 어떠한 공포스럽고 두려운 상황에서도 개인의 일상은 지속되어야 한다. 일상은 때로는 인생보다 위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일상이라는 것이 낯선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는 강력한 면역 백신이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일상을 위해 보다 공고한 신뢰 관계의 회복이 필요한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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