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택(송강호)은 번번한 사업 및 취업 실패로 백수가 전업이 되어 버린 가장이다. 이렇다 할 직업은커녕 남들 다 가는 대학조차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멀리하는 아들 기우(최우식)와 딸 기정(박소담)은 물론, 운동선수 출신 아내 충숙(장혜진)조차 진득이 유지할 일자리를 대기 힘든 전원 백수 가정의 명분만 가득한 가장이다. 살 길이 막막하던 중 쥐구멍에도 볕은 찾아들듯이 아들 기우에게 친구 민혁(박서준)은 솔깃한 제안을 하게 된다. 민혁의 제안으로 부잣집 동익(이선균)의, 집에 과외선생 대타로 찾아들게 되고, 이내 그 인연은 기정의 미술교사 기택의 운전기사, 그리고 충숙의 가사 도우미까지 연쇄 위장 취업에 성공하게 되고, 거짓과 조작으로 만들어진 그들의 이력과 임기응변에 동익의 두 아이들은 물론 동익의 처 연교(조여정)까지 신임을 하게 되는데... 이들의 묘한 인연은 뒷 탈없이 이어질 수 있을까? 기택 가족의 기생은 지속 가능한 완전범죄의 사기극으로 결론지어질 수 있을까?
계급과 계층의 경계에선 '삑사리'의 소동극
영화 <기생충>은 불편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기택의 가족은 하루하루 먹고 살기가 걱정일 만큼 절박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다지 다양하지 않다. 피자집의 배달 박스를 접어 납품하는 일에도 불량품이 많아 지적을 받는 일은 십상이고, 수 만원에 이르는 통신비를 내기 힘들어 화장실 구석에 올라 타 와이파이 가로채기를 하는 것은 일상이다. 생계를 위해 과외하러 들어 간 부잣집에선 본업인 과외 교습보다는 과외 대상인 딸내미에게 끌리는 욕정이 치밀어 오르고, 집주인만 속이면 그만 일 것 같은 일에 이전 가사 도우미 문광(이정은)의 집착은 예상 밖의 거센 도전이 된다. 집주인이 캠핑 간 사이 벌려 놓은 술판 끝에 찾아든 것은 생각지 못한 불청객이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폭우 때문에 모든 것은 들통나기 일보 직전이 된다. 이런저런 소동 끝에 수습한 가족은 폭우로 반지하 집이 잠겨 버린 수재민이 되어 버리고, 최후의 보루라 생각된 대저택의 비밀 공간은 이미 선점한 문광네 부부의 저항으로 쉽게 자리 잡기 어려워진다. 모든 것이 계획이 되어 있어도 생각하지 못한 변수는 다가 오기 마련이고, 그 변수라는 것이 외부적인 저항도 있지만 스스로의 헛발질도 한 몫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런 헛발질을 흔히 '삑사리'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흔히 '삑사리'를 경험하게 된다. 뜻하지 않은 변수, 그것도 스스로 만들어 낸 헛발질에 잔뜩 힘준 계획들은 허무하게 무너지게 마련이다. 당구대에서 큐대를 잡고 멋있게 쵸크 칠을 한다. 이리저리 테이블 주위를 돌며 개념도 없는 입각과 출각을 어림 잡아 본다. 수구를 겨냥하고 큐대를 잡아 고정된 받침 손가락 사이로 두서너 번 펌프질을 한다. 남은 것은 멋있는 나이스 샷일 것만 같은데, 그만 큐대는 목적구를 빗맞아 버리고 헛손질처럼 허무한 결과가 된다. '삑사리'가 난 것이다. 이 뿐 인간 한 껏 뽐내려 고음 위주의 선곡을 하며 노래방 마이크를 잡았지만, 주요 하이라이트 구간에서 그만 음이탈이 나고 만다. '삑사리'가 난 것이다. 이렇듯 '삑사리'는 계획에도 없었고, 그 계획에 방해 요소가 될 예상 위협에도 자리 잡지 않을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일어날 때를 말한다.
영화 <기생충>은 다분히 전형화된 두 가족, 아니 어쩌면 세 가족의 모습을 보여 준다. 세상에는 다양한 계층과 계급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구분되어 경계를 이루게 되는데, 이런 계급의 모습을 대칭적이고 대응적으로 묘사한다. 쿰쿰한 냄새가 스크린 밖으로 날 것만 같은 기태 가족의 반지하 방과 그래픽으로 만들고 세트로 표현해야 했던 동익의 저택은 극명하게 대칭되고 비교가 된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속의 가족은 계급을 대변하고 대의하고 있다. <괴물>의 모래알 같던 가족들의 생존기가 그러하고, <마더>의 맹목적인 모성애의 모습, 그리고 <옥자>에서 표현되는 동물과 인간의 가족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면에서 일본의 고레에다 히로키 감독의 '가족' 테마와 비교가 되곤 하는데, 사실 세심하게 들여다보면 두 감독의 가족은 엄연히 다르게 보인다. 고레에다 감독의 가족은 '가족의 의미'를 부여하여 해체되고 결합되는 가족의 '일상'이 녹아 있다면, 봉준호의 '가족'은 실제 생활하는 가족의 표피적인 모습이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계급을 표현하는 대의적 가족의 '상징'이 녹아들어 있다.
봉준호 감독의 가족의 모습에서 가족 내부의 갈등은 쉽게 표현되지 않는다. 그 가족이 외부의 집단과 세상과의 접점에서 만나는 경계의 부조리와 불균형을 풍자해 내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생충>에서 일어나는 '삑사리'의 소동은 계급과 계급이 충돌하고 계층과 계층이 맞닿아 있는 보이지 않는 이 세상의 치열한 '전선(戰線)'을 표현하고 있다. 면과 면이 맞대면 선이 만들어지듯이 서로 상충하고 상이한 두 계층이 만나는 경계는 생각보다 복잡하고 난해하며, 치열하고 버겁다. 영화의 제목 <기생충>이 비유하듯, 세상의 계층과 계급이 극단적으로 양분되어 양 끝으로 치닫는 현대 사회에서 자생하기 어려운 누군가는 이미 충분히 가진 어떤 이에게 기생할 수밖에 없게 된다. 마치 기생충이 숙주의 몸에 붙어 양분과 주요 요소를 뽑아 먹듯이 어떤 이의 충분한 재화를 가난한 누군가가 빌어 먹게 되는 것이다. 단편적으로 보면 염치없는 가난한 자들의 기생이 개탄스러워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세상을 좀 더 세밀하고 정교하게 바라본다면 그 생각은 짧은 편견으로 드러날 수 있다. 가진 자들도 누군가의 노동과 소비와 지출로 인해 가지게 된 것이고, 상대적으로 그들의 궁핍이 어떤 이들의 가진 것을 돋보이게 하니, 누가 어떤 이의 기생인지 어떤 이의 누군가에게 빌붙음인지 가늠하기 어려워진다. 이렇듯 면과 면이 맞닿은 경계에선 복잡하고 난해한 일들이 계속 일어난다. 아무리 좋은 계획이 있고 전략이 있더라도 그런 충돌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삑사리'는 예상할 수 없는 변수가 되고, 그 변수는 '일상'을 '소동'으로 휘몰아치게 마련이다.
L'art du Piksari
프랑스의 권위 있는 영화 전문잡지인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는 일찌감치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삑사리의 미학'으로 표현했다. 등장하는 주요 인물과 상황이 어이없고 예고 없는 실수와 실책으로 '사건화'되는 것이 봉준호 감독의 주요한 스토링 텔링 기법이라는 것이다. 이 표현을 처음 접하고 격하게 수긍되었다. 데뷔작인 <지리멸렬>부터 첫 장편영화 <프란다스의 개>는 물론, 연극 <날 보러 와요>를 기반으로 다룬 화성 연쇄 살인사건 테마의 <살인의 추억> 마저도 그 어이없는 '삑사리'의 향연은 주요한 도구로 사용된다. 그래서 봉준호 감독의 주요 등장인물이자 작품의 화자는 좀 덜 떨어지고 한구석 비어 보이는 '덜 갖추어진' 사람으로 그려진다. 계획으로 일관된 이야기 표현인 영화에서 주인공이나 주요 인물은 작품 주제와 목표를 향해 빈틈이 없는 진행을 일삼기 마련이지만, 봉준호의 영화에서는 기대하기 어렵다. 봉준호 영화의 주요 인물은 계획은 있으나, 그 계획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 '삑사리'의 수렁에 갇혀 버리게 된다. 여기서 관객은 영화와 세상의 조응을 맛보게 된다. 빈틈 많고 헛발질 가득한 등장인물에 이 시대의 풍자와 비유를 쉽게 떠 올리게 된다. 어쩌면 이 '삑사리' 마저 철저하게 계산된 감독의 계산이었을지도 모른다. '삑사리'없는 일상은 없을 것이고, 일상이 없는 인생 또한 성립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삑사리'에 대한 두려움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계획'하기 어려워하는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기우가 '무계획이 가장 좋은 계획'이라고 말하 듯, 계획이 없다면 틀어지거나 무너질 일은 없으니 말이다. 그것도 '삑사리' 따위에 말이다.
계획이 다 있는 봉테일 봉준호 감독
한국 영화는 산업과 작품으로 양분하여 평가할 수밖에 없다. 그 양분된 영역의 평가는 극과 극을 달한다 해도 허언은 아닐 것이다. 한국영화 산업은 매우 진 부적이고 폐쇄적이며 얕은 수익구조 계산에 갇힌 덜 진화한 산업으로 남아 있다. 재무제표로 모든 성과를 따지는 대기업들에게 배급과 상영의 권한을 몰아주고, 제작자나 창작자들에게는 그 배급과 상영이라는 유통구조를 독점하는 대기업들의 입맛에 맞출 수밖에 없는 자괴적 현실을 부여하게 되었다. 이런 산업적 토양에서 시대와 조응하고 세상과 호흡하는 '대가'급의 창작자나 제작자를 배양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로 보인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우리는 이 좁은 시장을 뛰어넘는 '작가주의'라 부를 수 있는 창작자들을 천운으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어찌 보면, (슬픈 현실이긴 하지만) 이 불가피하고 불가항력적인 산업의 조건은 작품적인 측면에서 좁고 폐쇄적인 한국 국내 시장을 뛰어넘는 성과를 남길 수 있는 마중물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홍상수, 김기덕, 박찬욱, 그리고 봉준호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봉준호 감독은 인터뷰에서도 수차례 밝혔듯이 '할리우드 키즈'였다. 한 때 변두리로 불린 잠실의 아파트 촌에서 평범하게 공립학교를 다니면서도 '영화'라는 목표와 방향은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말한다. 강변의 신설 공립고등학교 교실에서 공부를 하다 어느 여름철 홍수를 경험하게 된다. 고등학교 교실 창밖으로 길게 펼쳐진 성내천 뚝 방위로 넘실 대는 물보라를 보며 우리가 기억하는 한국형 블록버스터 <괴물, 2006>의 프로토타입을 떠 올렸을지도 모른다. 한국 초창기 산업미술과 디자인계에서 제법 유명하던 부친의 영향으로 그림 그리기는 취미 이상이 되었고, 구인회와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로 유명한 구보 박태원 선생을 외조부로 둔 그에게 이야기는 유전자 미토콘드리아 깊이 내재된 레거시였을지도 모른다. 공부를 제법 한 결과 연세대 사회학과에 진학해서도 그는 '만화사랑'이라는 만화동아리에서 학창 시절의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고,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으로 이어지는 대학 시절의 시국의 외변 요소로 인해 뜻하지 않은 경찰 연행과 유치장 경험은 그의 반골적이면서 비판적인 '사회관'과 '세계관'을 뚜렷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요동치고 휘몰아치는 세상에서도 봉준호 감독은 '방향'과 '목표'를 상실하지 않았나 보다. 결국 한국예술 종합학교로 진학해 본격적인 '영화쟁이'의 길을 선택하고, 그 선택한 길 위에서의 도전과 노력으로 지금의 '대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태생적인 집안의 내력이나 환경은 이미 주어진 것이라 볼 수도 있지만, 많은 고민과 갈등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은 것은 그의 '계획'이 그만큼 단단하기 때문이리라 생각이 된다.
비즈니스나 공적인 영역에서도 흔히 '계획'이라는 단어는 수없이 쓰인다. 있어 보이기 위해 '플랜'이니 '프로젝트'니 '전략'이니 하는 말로 포장되지만, 결국 목표하고 지향하는 무언가 를 얻기 위한 시간과 공간, 그리고 행동에 대한 '미리 한 생각'이 '계획'으로 자리 잡게 된다. 결국 계획이라는 것은 달성하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한 필수적이고 충분적인 조건이자 요소가 된다. 그 계획을 성과로 내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좌절하고 다시 도전하는 것이 인간사이고 인간의 하루하루로 채워지는 일상이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 계획이 디테일하고 획기적일지라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계획을 하게 된 궁극적인 이유, 목표와 방향이 뚜렷하지 않다면 백계가 무효할 수밖에 없다.
봉준호 감독은 잘 알려진 대로 스토리 보드 콘티를 직접 그리고, 시나리오를 직접 쓰던 적어도 각색하여 자신의 손을 거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컴퓨터 그래픽이나 특수 효과 등의 후반 작업 담당자들은 봉 감독의 디테일한 디렉팅에 혀를 내두를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 한다. 수 천 번의 렌더링이 필요할 것 같은 <옥자, 2017> 같은 영화에서 꼼꼼한 계산과 설정으로 삼 백여 렌더링으로 마무리한 예는 유명하다. 그뿐 아니라 촬영신과 커트에 대한 계산과 구성을 치밀하게 해서 배우는 물론 스텝들의 '불필요한 초과근무'를 미연에 방지하고, 그 유명한 표준계약서를 작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내었다. 이 모든 치밀한 행위와 꼼꼼한 계획이 단지 '당위'와 '명분'으로 기인하지 않고, 빡빡한 일정과 예산이라는 '현실'때문이었을지라도, 우리 영화계에 던져 주는 메시지는 명료해 보인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에게 '봉테일'로 알려진 봉준호 감독의 디테일한 '계획'이 돋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그 '계획'이 있어야만 하는 '방향'과 '목적'이 흔들리지 않았으며, 그 '계획'이 아무리 꼼꼼하고 치밀하다 하여도 이 세상과 섭리가 부여하는 '삑사리'에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삑사리'를 예상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해하고 수용하며 자신의 '미학'으로 발전시킨 봉 감독에겐 이미 '계획'이 다 있다.
"돈을 벌어서 대저택을 사겠습니다. 아버지는 그때 그저 계단만 올라오시면 돼요. 그럼 안녕히 지내세요."
영화 말미에 머리에 부상을 입고 정신이 가출한 아들 기우가 대저택 지하실에 갇혀 있는 아버지 기택에게 편지를 쓴다. 참 어처구니없는 계획, 허무맹랑한 계획처럼 들린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계획을 봉준호 감독은 현실에서 이루어 내는 듯 보인다. 오늘(2020. 2. 10) 92년이 된 미국 지역(?) 영화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각본상, 국제영화상, 감독상, 그리고 작품상까지 거머쥔 쾌거를 거두었다. 92년 최초의 '외국어'로만 된 영화가 작품상을 받았고, 1955년 <마티> 이후로 65년 만에 두 번째로 칸의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작품상을 석권하게 되었다. 그저 '대단하다'라고 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다. '계획'이 있는 봉준호 감독의 다음 작품이 더 기다려지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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