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력과 경험을 두루 갖춘 최고의 암살자 던컨 비즐라(매즈 미켈슨: a.k.a 블랙 카이저)는 50세가 되기까지 14일을 남기고 은퇴를 준비한다. 대부분 은퇴자들의 노후 계획을 설계하듯, 회계사를 찾아 재무상담과 8백만 달러가 넘는 퇴직연금의 지급 일정을 확인한다. 그를 고용한 다모클레스의 수장 블럿(맷 루카스)은 그에게 마지막 임무가 될 벨라루스에서의 암살 미션 수행을 주문한다. 자신과 같이 은퇴시점을 앞둔 킬러들이 잇달아 죽음을 당한 사고에서부터 이상한 낌새를 챈 던컨은 예상된 일정을 앞당기며 벨라루스에서의 위기를 넘기게 되고 아무도 찾기 힘든 곳으로 잠적을 한다.
하루 종일 눈이 내리는 몬태나의 시골 마을에 숨어든 던컨은 매일 밤 그가 잘 못된 정보로 죽인 일가족에 대한 악몽을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한다. 퇴직 후의 일상이 그러하듯 매일 취미와 일상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며 한적한 시골생활을 즐기던 중, 옆집에 사는 겁도 많고 수줍음도 많은 젊은 여인 카밀(바네사 허친스)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다. 사소한 것에도 깜짝깜짝 놀라는 그녀에게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여 공격을 방어하고 총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친다. 그녀를 만나고 난 후 던컨의 생활은 제법 은퇴자의 일상으로 자리 잡혀 가는 듯하다. 어린 학생들에게 생뚱맞은 일일교사를 수행하고 독한 버번과 벌꿀을 넣은 '윈터 커피'에 익숙해지고 소박하지만 소중한 하루하루를 꿈꾸게 된다.
행복한 날들은 언제나 짧게 느껴지는 법. 예상하지 않았든 직감으로 느꼈든, 블럿은 그의 새로운 젊은 킬러들로 하여금 그의 은신처를 찾아내고, 그를 제거하기 위해 작전을 감행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젊은 킬러들을 제압하지만, 블럿의 플랜 B는 간파하지 못하고 카밀이 납치되는 것을 막지 못한다. 그의 평범한 은퇴자로서의 미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블럿과 그의 심복 비비안(캐서린 윈닉)이 진두지휘하는 무장한 블럿의 군대들과 머리와 머리를 맞대는 일대 절명의 순간에 놓이게 되는데.
던컨은 이 위기를 넘기고 카밀과 함께 꿈꾸던 은퇴자의 생활을 누리게 될까?
블럿은 은퇴의 시점에 있는 던컨에게 왜 그리 집착하는 것일까?
그래픽 노블 원작의 '센'영화; 폴라(Polar: Came from the Cold)
세다. 오래간만에 센 영화를 보았다. 영화 <폴라(Polar: Came from the Cold)>는 살인을 업으로 삼는 킬러와 그 조직 간의 물고 물리는 복수를 그린 뻔한 구조의 이야기이지만, 그 이야기의 방식과 묘사는 정말 세다. 유혈이 낭자하는 폭력의 묘사는 다반사이고 질펀하고 말초적인 섹슈얼의 자극이 넘쳐나는 영화이다. 피칠갑이 되는 살인과 고문의 묘사나 포르노를 연상시키는 서사 없고 감정 없어 보이는 섹스 씬이 주저함 없이 펼쳐진다. 심의가 없어도 일상에 지장을 받지 않는 성숙한 사람들이나, 심의가 있어도 자극적인 것만 뒷 문으로 열심히 찾아보는 마니아들에게 모두 '센' 잔상을 남겨 주는 영화이다. 영화가 이런 세고 몰아붙이는 자극만 있다면 영화로서의 매력은 반감되거나 소멸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영화 <폴라>의 경우는 넘쳐나는 자극이 영화의 완성도를 가져다준다.
자극적인 스타일은 흔하디 흔한 이야기 소재에 그래픽 노블을 원작이라는 신선하지 않은 기획이 가져다 줄 만성적인 내성을 뚫어 주는 장치로 작용한다. 영화<폴라>는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한 영화(물론 마블이나 DC는 논외로 하고)들의 검증된 스타일을 떠 올리게 한다. 앤터니 존스턴과 존 하트의 <Coldest City>를 원작으로 만든 냉전 시대의 스파이물인 <아토믹 블론드(2017)>, 프랭크 밀러의 다크 누아를 만화 같은 영화로 만든 <씬 시티(2005~2015)>의 감각적이고 자극적인 편집과 스타일 구성이 녹아 있다. 거기에 더해 킬러와 그와 대척하는 조직이라는 뻔한 이야기를 찰진 이야기로 풀어낸 <킬 빌>이나 <존 윅> 시리즈의 해리티지를 엿볼 수 있고, 드라마 시리즈 <한니발>이나 <덱스터> 같은 건조한 광기에 대한 내러티브도 맛볼 수 있다. 자극이 넘쳐나지만 그 자극이 과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 <폴라>는 스타일적 구성을 극한까지 밀어 붙임으로써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전하는 묘한 영화로 다가온다. 그래서 영화 <폴라>는 무척 세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 은퇴 연도에 놓인 자
"글쎄요. 평소에 하던 거"
프로페셔널한 던컨은 그의 재직(?) 중에 늘 그러하듯, 담당 의사에게 건강 및 신체를 검진받는다. 기흉이 있고 반월판이 파열되는 등, 직업병으로 수선 가득한 몸뚱이가 되었지만 딱히 생명을 단축할만한 심각한 질병 없이 나름 몸 관리를 잘 해온 그에게 담당 의사는 묻는다. 은퇴를 하면 제일 무엇이 하고 싶냐고. 던컨은 그저 평소에 하던 거라고 답하지만, 의사는 이내 말한다. 세상에서 남자는 은퇴 연도에 가장 위험한 존재가 된다고 말이다. 은퇴를 하게 되면 '별난' 취미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딸 뻘되는 여자와 잔다고 하는 담당 의사의 예시가 일반적이지 않지만, 은퇴하는 남자들은 자기의 지난 고된 삶을 대접받고 싶어 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인다. 그것도 왕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리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본인의 지난 가열찬 하루하루가 보잘것없는 결과로 남겨지고, 열심히 일한 노동의 대가도 나중에 나오는 공적 연금 몇 푼이 다이기에 집에서는 늘어선 오래된 가구처럼 늘 앉던 자리에 앉아 있는 그저 '집에 있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평소에 하던 것이라고는 직장에서 하던 일들이 전부였던 은퇴자에게 별난 취미란 큰 의미가 없다.
던컨도 시골 마을에 하나 있는 마켓에서 장을 보며 엿들은 정보로 취미를 위한 DVD를 자판기에서 뽑아 보고, 반려 동물이라도 키워볼 생각으로 팻 샵에서 무턱대고 강아지며 금붕어를 입양한다. 그도 쉽지 않다. 평소에 해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밤마다 찾아오는 지울 수 없는 실수로 인한 악몽 때문에 기껏 데리고 온 강아지에게 총을 쏘아 대고, 금붕어만 해도 딸려온 안내서를 읽으며 시간 맞추어 일용할 양식을 투여해 주는 일도 영 시원치 않다. 사람이라는 것이 꼭 암이나 질병만으로 죽는 것이 아니더라, 머릿속에 있는 살인마를 꺼내게 되어 세상을 정리하고 싶어만 지기 때문이다.
'속 빈 강정'이라는 말이 있다. '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도 있다. 보통 겉이 화려하고 번지르하면 그 내용은 별로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영화에도 일반적으로 적용 가능한 비유가 될 수 있다. 최근 국내 영화의 최대 괴작이었던 <리얼>을 떠올려 보면 금방 수긍이 가는 이야기다. 대체로 스타일이나 자극적인 편집 등으로 외형에 힘을 준 영화들이 정작 중요한 내면의 스토리 텔링이나, 내러티브에서는 힘이 쭉 빠진 경우를 많이 만나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폴라>의 경우는 그 알맹이도 알차게 들어 차 있다. 물론 개인적인 취향과 해석의 차이는 천차만별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다가 온 영화였다.
영화에서의 주인공은 50살이 정년인 전문 암살자이다. 그의 직업적 특수성이나 사회적인 통념을 생각했을 때, 하는 일의 정당함에 대한 판단은 떠나, 임무 수행의 날들이 녹록한 시간들이 아니었을 것이다. 평범한 가장이 누리는 따뜻한 가정도 이루지 못했고, 일을 수행하는 하루하루가 위태로운 줄타기의 연속일 뿐이다. 그에게 마음 한 구석 채워줄 수 있는 것은, 남들 모르게 매년 거액을 지원하는 기부처가 있다는 것과, 이제 14일 남은 은퇴 후에 받게 될 목돈의 두툼함 뿐일 것이다. 이미 그는 '늙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 임무 수행의 완벽함은 어제나 오늘이나 별반 다르지 않고, 병원에서의 검진도 늘상 달고 다니는 직업병 외에는 특별한 증상조차 발견되지 않는다. 재무를 관리해 주는 회계사와의 미팅도 그저 '변동 없이 그전처럼'의 확인과 확인을 거듭할 뿐이다. 하다 못해 골프 핸디캡도 그대로이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얼굴에 깊게 패여 가는 주름과 그와 비례하는 생물학적 '나이'일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직에서 정해 놓은 퇴직은 거스를 수 없는 법이 되었다. 그저 수긍하며 그간 연간 6%의 수익 성장에 기여한 조직에서 보장한 퇴직 연금의 절반을 일시 수령하는 날만 기다릴 뿐이다. 하지만, 늘 행복한 상상은 일방통행이 허락되지 않는 것. 조직은 그에게 퇴직 연금을 일시불로 지급을 고민한다. 아니 지급할 생각이 없다. 그의 임무 수행이 끝난 뒤 남겨진 퇴직 연금은 조직에게 헌신의 징표가 아니라 그저 비용이고 잠재적 상환 의무가 있는 채무일 뿐이기 때문이다.
"내 몸 팔아 돈 버는 것이지, 내 인생은 안 팔아."
던컨은 벨라루스에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단골 창년에게 찾아간다. 임무 수행을 위해 필요한 까닭도 있었지만, 그녀에게 던컨은 새로운 인생에 대해 물어본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아이가 던컨의 아이라 착각하지 말라고 하며, 단칼에 제안을 자른다. 몸과 능력은 돈벌이로 팔 수 있지만, 인생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던컨에게도 인생은 그러한 것 아니었을까. 몬태나 시골 마을 학교에서 일일 교사로 가르칠 수 있는 것은 킬러로서 방문한 99개국에서의 경험담이고, 그 경험은 평범한 이들에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평범한 시골 마을 아이들에게 구르카 용병의 칼 사용법이나 땡볕에 3일 이상 방치된 시체의 모습 등이 유용함으로 다가오기에는 너무 먼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전문가도 전문의 영역이 아닌 이상 그저 '아저씨'일뿐이고, '늙은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고되고 힘겨운 노동의 마지막 보상은 당연한 약속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기업의 형태를 띤 조직의 입장은 전혀 다르다. 그들에게 킬러들은 그저 수익을 창출하는 수단이고 도구이다. 더 이상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다면 '비용'이고 '손실'에 불과하다.
2대째 암살단 '다모클레스'를 이끌고 있는 블럿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그는 날이 갈수록 손익이 벌어지는 이 사업을 청산하고 싶다. 인수 의향이 있는 사람들에게 사업을 넘기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그 인수의 과정에서 잠재적인 손실 '퇴직 연금'은 부채로 장부에 남기 마련이다. 매수자들에게는 무척이나 불편한 숫자들이 되고 만다. 블럿에게 선택지는 많지 않다. 그 손실의 원인을 제거하고 장부를 깨끗하게 만드는 것만이 숙원 사업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사실상 사용자의 의사결정은 복잡하지 않을 수 있다. 숫자와 숫자 사시의 행간만 읽어 내면 그만인 것이다.
꽤 익숙한 이야기다. 지금의 우리가 사는 세상과 그래픽 노블이나 영화에서 보여주는 과장된 킬러들의 세상이나 별반 다름이 없다. 사용자는 노동자를 '사람'으로 보기보다는 수익을 가져다주는 자본과 손실을 가져다주는 비용을 계산하곤 한다. 그 노동자가 수 십 년을 헌신하고 조직에게 매년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었는지는 좀처럼 떠올리지 않는다. 아니 떠 올리기엔 이미 지나버린 어제의 이야기가 되어 버린 것이다. 사용자는 자신의 결정과 리더십으로 조직의 성장과 성공을 이끌어 내었다고 정리하게 된다. 그리고 닥쳐온 위기에서 많은 고민과 숙려보다는 눈에 보이는 현상에 주목하여 나름의 '바로잡기'를 행세하고 만다. 매출이 급감하고 이익이 반토막이 나는 데에는 수만 가지의 역학관계와 원인이 존재한다. 시장이 포화되었거나, 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났거나, 그 상대와의 경쟁력이 형편없어졌거나, 외부에서 요구하는 비용이 증가되었거나, 사용자나 오너의 리스크로 돈이 세어나가는 등 사업이 부진하고 어려워지는 이유를 찾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하지만, 이 위기를 극복함에 있어서는 가장 간단한 방법을 사용할 뿐이다.
그저 비용이 되고 손실이 되는 '사람'에게 책임을 묻고 정리하면 되는 것이다. 근본 원인을 찾고 수정하는 것보다 당장은 간단하고 손쉬운 일이 되기 때문이다. 오래된 노동자에게 정년 이전에 퇴직을 종용하고, 그 비용으로 신입들을 뽑아 댄다. 구조조정이라는 말로 명예롭지 않은 '명예퇴직'을 강행하면서 그 반대급부로 생긴 잉여로 오너 일가의 배당이나 최고 경영진의 급여 인상 잔치를 벌인다. 그뿐인가 법에서 보호하고 규제에서 관리하는 취약계층의 노동권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비용을 덜어 낸다. 최저임금과 주 52시간 제도가 문제라면서 정작 건물주와 가맹 본점과의 협상 테이블에서는 굽신 대기 일쑤이다. 몇 푼 되지 않는 사회 보험이나 퇴직 적립금을 주지 않기 위해 얄팍한 계산으로 이상한 타임 테이블로 노동 계약을 맺는다. 지금 내가 사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실제'의 일들이다. 영화와 다른 것은 던컨 같이 분노한 자들이 통쾌하게 복수하는 일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그저 나이 들어 감에 따라 움츠려 드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뿐이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우리가 늙어 가는 거지."
던컨은 납치된 카밀을 구하기 위해 멘토였던 포터(리처드 드레이 퍼스)를 찾아간다. 그를 찾아간 디트로이트 어느 골목 노인만 가득한 가라오케 바에서 그에게 묻는다. 자신을 없애기 위해 두 번이나 공격해 온 블럿의 의도와 지금 처해진 곤경이 무슨 연유인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포터는 늙어 가는 자들의 비애라 덤덤히 답한다. 끝내 그를 배신하면서 던컨의 유능함이 초래한 일이라 이유를 붙인다. 그런 것이다. 열심히 일하고 그것도 잘했기 때문에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도 빼앗긴 채 버려지는 것이다. 열심히 일한 게, 그것도 잘한 게 죄라니 기가 막힐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이고 실제이다.
내가 사는 시대와 공명하는 스타일, 조응하는 이야기
영화를 볼 때 저마다의 기준이 있을 것이다. 장르적 기호로 보는 경우도 있고, 이야기의 구성을 보면서 감동하기도 한다. 특정 감독의 연출이나 필모그래피를 추종하는 경우도 있고, 보다 전문적으로 영화의 편집이나 촬영, 기법에 대한 세세함을 따져 보기도 한다. 나에게 영화를 추천해 달라면, 영화나 장르를 꼭 집어 추천해 주기 매우 어렵다. 저마다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답은 주어야 하니 거들어하는 말은, 영화는 겉과 속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겉은 영화의 장르나 기법을 떠나서 '영화 다운' 자극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영화만이 줄 수 있는 시각적, 서사적, 기술적 표현으로 독특한 스타일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한다. 속은 영화의 내러티브나 서사적 드라마 투르키 등이 될 수 있는데, 그중에서 지금 이 시대와의 조응, 공명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장르물이면 이 장르가 지금 우리에게 주는 공명을 찾을 수 있어야 하고, 시대의 이야기라면 그 시대의 이야기가 지금의 시대와 어떤 상호 텍스트로 조응하는가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 여기,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면 좋은 영화가 아니다. 적어도 내 기준에 그러하다.
영화 <폴라>는 나의 기준에서 '잘 만든' 영화이다. 물론 스페인의 유명 그래픽 노블 작가인 빅토르 산토스의 원작의 힘도 있고, '마돈나'나 '레이디 가가' 등의 스타일 대명사인 디바들은 물론, '콜드 플레이', '메탈리카' 등의 락 뮤직까지 모든 음악 장르에서 뮤직비디오를 성공적으로 만들어 낸 감독 요나스 오케르룬드의 감각적인 연출도 눈여겨 볼만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영화의 타이틀 롤인 던컨 역의 매즈 미켈슨의 연기와 존재만으로도 영화는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할리우드 태생이 아닌 북유럽(덴마크) 출신의 연기자로 이제 할리우드에서 중요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그의 이전 작품들 <한니발 시리즈>, <더 헌트>, <미하일 콜하스의 선택>, <웨스턴 리벤지> 들을 주목할 기회도 반갑다. 영화의 겉과 속 그리고 그 안에서 연기하는 연기자와 살아 있는 캐릭터까지 살펴볼 수 있는 영화 <폴라>는 영화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2019년 넷플릭스 오리지널이 되었다. 아마도 2편을 기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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