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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읽기

[영화리뷰: 그린 북(2018, Green Book)] '나'다운 나를 찾아서; 선입견이 만든 편견 - 의도는 태도를 만든다

by 박 스테72 2020. 2. 9.

뉴욕 브롱스에 사는 이탈리아계 백인인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르텐슨)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주먹으로 해결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 전형적인 '남자다운' 남자이다. 나이트클럽 문지기이자 해결사로 일하던 토니는 클럽의 리모델링으로 당분간 돈벌이가 끊기게 된다. 일거리를 찾던 중 유명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셜리(마허 샬라 알리)의 남부 연주여행에 운전사로 합류한다. 1960년대 미국은 물질적으로 경제 최전성기의 꼭짓점에 달하여 있었지만, 여전히 짐 크로 법 등의 인종분리정책이 존재하던 시기였다. 이 엄중한 시기에 보이는 것과 완전히 다른 신분을 가진 두 사람은 맨해튼을 출발해서 미국 남부(Deep South)로의 8주간의 긴 여행을 나서게 된다. 북부와 달리 흑인에게 여전히 차별적이고 관대하지 못한 남부에서 온갖 차별과 멸시는 물론 끔찍한 일까지 경험하게 되는데. 토니는 계약한 8주간의 돈과의 투어 일정을 마치고 약속한 크리스마스이브에 가족들의 품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나 다운 나를 찾는 로드 무비; 그린 북 (Green Book)

영화 <그린 북>은 실화를 기반으로 한 휴먼 드라마를 로드무비의 형식을 빌어 만든 영화이다. 로드무비는 길 위에서의 여정 중에 일어나는 갈등과 사건, 그리고 화해와 해결로 인한 일종의 해소감과 대리만족을 가져다준다. 이런 이유에서 로드무비에서의 주요 인물들은 시작부터 대부분 극명한 대비점을 띄게 된다. 금세 기억으로 떠 올리기 쉬운 로드무비들을 살펴보면 납득이 쉬워진다. 자폐증 걸린 형 레이먼드(더스틴 호프만)와 돈만 밝히는 양아치 동생 찰리(톰 크루즈)의 평행선 같은 여행을 그린 <레인맨>, 보수적인 남편을 둔 가정주부 ‘델마’(지나 데이비스)와 식당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루이스’(수잔 서랜든)의 거침없는 질주가 있는 <델마와 루이스>, 영화 <그린 북>을 보면 생각나는 프랑스 영화 <언터쳐블 1%의 우정> 속의 주인공들은 서로 섞이기 힘들 만큼의 거리와 차이를 드러내 보인다. 그런 서로의 다름과 거리를 '길 위'에서의 모험과 사건들로 해소하고 줄이면서, 결국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어 준다는 이야기로 끝맺는다. 이런 점에서 영화 <그린 북>은 전형적인 멜로드라마나 휴먼 드라마의 공식을 가진 뻔한 '로드 무비'로 보인다. 자칫 진부한 그렇고 그런 이야기처럼 보이는 <그린 북>은 묘한 긴장감과 몰입감을 준다. 그 이유는 이미 머릿속에 자리 잡힌 '흑인과 백인의 우정을 그린 로드무비'의 설정을 비틀어 놓은 데에 있다. 부유하고 가진 것 다 가진 성공한 흑인 예술가와 번번한 직업 없이 주먹으로 먼저 해결하는 하층계급의 백인 운전사의 설정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를 비틀어 놓은 것이다. 그런 설정의 역전 말고도 영화는 당연지사로 여기는 선입견들을 툭툭 건드리며 진행된다.

영화는 토니와 돈의 여행길에서 벌어지는 차별이나 멸시로 인한 사건을 밀도 있게 다루지는 않는다. 그저 덤덤하게 '있었던 일', '겪었던 일'로 풀어낸다. 영화는 그보다 토니와 돈 사이의 대화를 통해 둘 사이의 좁혀질 것 같지 않은 차이라는 것이, 사실 사람들이 어떤 이유에서든 부러 만든 억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역설하며 강조한다. 어릴 적부터 재능을 인정받아 레닌그라드(지금의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서 클래식 피아노를 전공한 돈은 흔히 다루어진 1960년 대의 흑인과는 다른 모습이다. 하물며 백인인 토니에게 편지 쓰기와 발음과 관련하여 훈수를 두며 잔소리한다. 돈은 흑인들이 좋아하는 프라이드치킨을 좋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먹어 본 적도 없다. 그뿐 아니다. 그는 당대 흑인 스타들 중의 슈퍼스타 리틀 리처드, 처비 체커, 냇 킹 콜, 샘 쿡, 아레사 프랭클린이 누구인지, 그들의 음악이 어떠한지 알지 못한다. 아니 달리 말하면 알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는 흑인이지만 흑인'답지' 않다. 흑인'다운' 모습이 프라이드치킨과 소울 깊은 흑인 음악이 말해 주는 것이라면 말이다.

"충분히 백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흑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남자답지도 않다면 그럼 난 뭐죠?"

돈은 세 배나 많이 받을 수 있는 북부의 투어 콘서트를 마다하고 멀고 위험한 남부의 깊숙한 지역으로 콘서트를 감행한다. 이유는 한 가지, 흑인도 백인들이 존중하는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 그들과 같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돈은 흑인 답지 않다. 백인들의 격식과 백인들의 '딕션'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백인 귀족들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행을 하면서 자신과 같이 백인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이탈리아 이민 2세 토니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생각이 복잡하게 올라오게 된다. 토니는 백인이기는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흑인의 차를 몰고 여행길에 오르는 가장일 뿐이었다. 돈이 바라보는 백인은 그저 피부색이 비슷하면 같은 사람들이라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러하지 않다. 이탈리아계라고 흑인과 같은 대접을 받는 남부 어느 지방도로 위에서 경찰에게 모욕을 당하는 토니의 모습은 돈이 생각하는 백인의 모습은 아니었다. 'Dear'의 철자를 틀리기 일쑤이고, '쇼팽'을 '죠팽'이라 부르며, 피츠버그를 가슴 큰 여자가 많아 '찌찌버그'라고 믿는 말초적 본능 가득한 허풍쟁이일 뿐이다.

뉴욕에 사는 이탈리아 이민 2세 토니의 삶도 평탄하지 않다. 토니가 사는 뉴욕의 브롱스(Bronx)라는 지역의 특징만 보아도 그의 삶을 가늠할 수 있다. 뉴욕은 국가의 역사에 비해 도시의 역사로 보면 제법 의미가 있는 연한을 지니고 있다. 그 중심에는 ‘이민자의 도시’라는 것이 저변에 깔려 있다. 뉴욕은 크게 다섯 개의 자치구로 구성되어 있다. 미국을 가지 않아도 잘 아는 맨해튼, 그리고 그 옆의 스테이튼 아일랜드, 브롱크와 브루클린, 퀸즈 이렇게 다섯 개의 구로 나누어져 있고, 다섯 개의 자치구는 각각의 특색이 확연하다. 맨해튼은 이민자가 되었건 미국의 토착 이민이 되었건 성공의 상징으로 중 상류 층과 경제 주류가 모여 사는 곳이고, 퀸즈는 한인타운으로 익숙하다. 브롱크는 흑인들과 저소득층의 구역이라는 인식이 크고, 브루클린은 작은 유럽처럼 유럽 이민자들이 모여 형성된 그런 지역이다. 전후(前後)의 유럽이 대부분 그러하였듯 이민자들의 고향 경제상황은 최악이었다. 패전국인 이탈리아나 기근의 나라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가난이라는 국적과 같은 지긋지긋한 살(殺)로부터의 탈출은 늘 그리는 희망고문이었을 것이다. 그 희망의 반대편에는 미국이 있고, 그 미국의 상징적인 도시 뉴욕이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살아간다고 모두 미국인의 주류로 대접받는 것은 아니었다. 백인은 모두 백인이라는 선입견은 그저 게으른 생각의 편견일 뿐이었다.

 

1962년 미국, 그럴싸한 야만의 시대

영화 <그린 북>은 1962년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미국의 1962년은 여러모로 모호하고 애매하고 혼란스러운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두 번의 세계 전쟁과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은 군수 산업과 참전 수당 등으로 인하여 최전성기의 경제 호황을 맞이 하게 된다. 산업과 기술은 투입되는 자본과 비례하여 급속하게 발전하게 되고, 이미 생산수단을 점유한 유산계급들은 그 옛날 유럽의 귀족들이 부럽지 않은 세상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여전히 가난한 이들은 가난하게만 살아가고, 차별받는 사람들은 이성적인 이유 없이 차별받아 마땅한 부조리한 세상이 있었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인종분리로 흑인들은 백인들보다 경제적 후원, 주거지 등에서 열등한 대우를 당연시하게 받았다. 이것은 곧 경제, 교육, 사회 등에서의 불평등을 낳게 되었다. 합법적인 분리정책은 불공평한 조합 업무를 포함한 강제적인 집 계약, 대출관행, 그리고 직업 차별대우 등 공공영역에서의 차별도 인정하였다. 대표적인 분리법제인 '짐 크로 법'의 예를 들자면 공립학교, 공공장소, 대중교통에서의 인종 분리는 물론, 화장실, 식당, 식수대에서의 백인과 흑인 격리 등이 있었다. 미국 군대에서도 백인과 흑인은 분리되었고 베트남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나 군대 안에서의 분리도 사라졌다.

잘 아는 이야기처럼 남북 전쟁 후 남북 통합기(1865)에 북부에서는 공화당이 노예제 폐지를 내걸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당이 장악하던 전통적인 남부 11주는 반대로 ‘노예제 유지’를 여전히 원하고 있었다. 이 충돌의 근원에 남부 11개 주가 선수를 쳐 흑인 준노예 시스템을 정당화하는 듯한 《흑인 단속법》(Black Code)을 제정했다. 당시 산업 발전이 시작되었던 북부 도시(디트로이트, 시카고 등)와는 달리 남부에서는 흑인 노동력에 의한 농업이 여전히 경제의 기초였다. 그 때문에 "흑인이 백인과 평등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 남부 경제를 지탱하는 유력한 백인 농장주들의 본심이었다. 이 《흑인 단속법》이 향후 "분리되어있지만 평등하다."라는 불합리한 인종분리정책인 〈짐 크로우 법〉의 초석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흑인을 대표하는 유색인종들은 '분리'되기 때문에 '자유민'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누릴 수 있다는 궤변 중의 궤변의 논리가 된다. 이러한 불합리와 야만의 차별에 대하여 본격적인 교정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은 1965년 마틴 루터 킹 목사로 대변되는 흑인 인권운동의 본격화부터였다.

 

의도는 태도를 만든다.

1895년 출간된 [종의 기원]에서 다윈은 지구의 모든 생물은 공통의 조상에서 진화해 나왔다는 견해를 펼쳤다. 150년이 지난 지금 다윈의 후학들은 40억 년 세월 동안 진화해 만들어 낸 어떤 동물의 유전자 지도를 그리고 있다. 바로 인간 게놈(genome)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과학자들은 성염색체를 포함한 23쌍의 인간 염색체의 유전자 염기서열을 밝혀 내었고, 지역과 '인종'에 따라 어떤 차이와 차별점이 있는지를 연구한다. 이런 중에 2017년 미국의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인종주의 성향을 드러내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그중에 DNA 분석과 관련한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자신들이 '순수한 백인'임을 확인하고 싶어서 DNA 분석을 의뢰했고 그 결과를 받아 들었는데, 예상치 못한 결과에 그들은 심각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의뢰한 자들의 2/3가 순수한 백인의 DNA가 아닌 다른 인종의 DNA가 섞여 있다는 결과를 받은 것이다. 이에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조사 결과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거울로 보았을 때 백인이면 된다고 자위하거나, 테스트 결과보다 마음가짐이 문제라고 둘러 대곤 하였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인간의 전통적인 '인종'의 개념을 무너뜨린 것이다. '종(species)'와 달리 '인종(race)'은 생물학적 근거를 가진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외모와 피부색은 다르지만 모든 '인종'은 똑같은 지적, 정서적, 육체적 능력을 가진 호모 사피엔스인 것이다. 생물학에서 종을 나누는 기준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서로 교미해서 번식 능력이 있는 자식을 낳으면 같은 종인 것이다. 따라서 사람을 '인종'으로 나누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하는 반성이 밀려든다.

미국인들은 미국과 미국인이란 자유와 평등의 또 다른 대명사라 치켜세운다. 그런 우쭐댐으로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고 온 세상의 판관이고자 애쓴다. 최근 '외계 통신'이라는 프로그램에 나온 제프리 주한 미국 상공회의소 회장이라는 자가, 미국의 경찰국가 역사는 200년이 넘었다고 주장하다가, 같이 나온 세계 각국의 패널들에게 면박을 받는 장면이 있었다. 그만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길지 않은 역사 속에서 '자유'와 '평등'이라는 것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이고 기회주의적인지 인정하는 미국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트럼프가 정권을 잡으면서 다시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의 줄임말로 흔히 '미국의 주류 백인 계급'을 말함)만의 미국을 꿈꾸는 듯한 행보가 만연하다.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쌓고, 영주권과 시민권을 대폭 제한하고, 유색 인종에 대한 비난과 멸시를 공공연히 표현한다. 정말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국'답지' 못한 생각이다. 아니 어쩌면 미국은 처음부터 모든 제약과 폭거로부터의 자유와 온갖 차별과 멸시로부터의 평등은 없는 나라일지도 모른다. 그저 미국은 그런 나라구나 하는 선입견이 깊은 편견을 낳았을 수도 있다. 영화 <그린 북>은 이런 면의 미국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래서 1962년도의 미담 같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가 왜(?) 21세기에 다시 울림을 주는가에 대한 대답이 된다. 영화는 어떤 시간과 시대를 이야기하든 영화를 보는 시대와 항상 대화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린 북>은 좋은 대화를 우리에게 건네고 있다. 영화 <그린 북>에서의 차별은 의도가 아니라 태도에서 시작한다고 평한 누군가의 글을 읽었다. 내 생각은 다르다. 차별과 폭력의 광기는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뼈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나오는 골수와 같은 의도에서 시작된다. 의도는 태도를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내밀었을 '그린 북'

토니 역의 비고 모텐슨은 20Kg을 불리고 영화에 등장한다. 그의 불린 몸 덩어리보다 놀란 것은 촐싹거리는 그의 말투와 몸짓, 그리고 비대해진 성대에서 눌려 반음 올라간 음성이었다. <반지의 제왕>이나 <G.I. 제인>, 혹은 <더 로드>의 다소 과묵하고 무게감 가득한 그의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 않다. '떠벌이 토니' 그 자체로 나온 그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 영화 <그린 북>은 가치 있는 영화이다.

영화 제목 <그린 북>은 흑인들이 남부를 여행할 때 지참하는 안내서를 지칭한다. 유색인종이 이용할 수 있는 숙박업소, 식당, 그리고 각종 제한 규범을 안내해 준다. 흑인에게는 분리함으로써 안전해지는 미국을 보장해 주는 필수서 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서 1991년 개봉한 <그린카드>의 초록색이 떠 올랐다. 미국에서 주거의 안정을 대표하는 색이 '그린'색이라니.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느새 이웃으로 다가선 피부색 다른 누구에게 자의든지 타성이든지 '그린 북'을 건네주는 것은 아닌지, 그들에게 이 땅에서 살기 위해 자신도 거친 적 없는 검증의 '그린카드'를 요구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때이다. 1962년 미국의 어떤 사람들의 유별난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논거 부족한 차별과 혐오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런 점에서 <그린 북>은 오늘날 유의미한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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