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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읽기

[영화리뷰: 카우보이의 노래(2018, The Ballad of Buster Scruggs)] 삶을 위한 죽음의 발라드; 죽음은 늘 느닷없이 온다. 삶이 그렇다.

by 박 스테72 2020. 2. 9.

영화 <카우보이의 노래>는 여섯 개의 이야기로 구성된 옴니버스 엔솔로지다.
그 여섯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1. 버스터 스크럭스의 노래 (The Ballad of Buster Scruggs)
2. 알고도네스 인근 (Near Algodones)
3. 밥줄 (Meal Ticket)
4. 금빛 협곡 (All Gold Canyon)
5. 낭패한 처자 (The Gal Who Got Rattled)
6. 시체 (The Mortal Remains)

 

코언 형제의 옴니버스 엔솔로지 서부극

동시대인이라 부를 수 있는 감독들 중 '천재적'이라는 수식어가 잘 들어맞는 감독이 내 머릿속에는 네 사람이 있다. 두 명은 한국 영화에서 중심을 잡고 있는 박찬욱과 봉준호이고, 나머지 둘은 미국 땅에서 세계적 명성을 떨치는 쿠엔틴 타란티노와 코언 형제 (조엘 코언, 이든 코언)이다. 그중 코언 형제가 18번째 영화를 내어 놓았다. 그것도 넷플릭스 플랫폼을 통해서 35년 만에 처음으로 디지털로 찍었다.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제작하였고, 그의 역대작 중에 가장 긴 러닝타임을 기록하였다. 바로 옴니버스 구성의 엔솔로지(단편선 구성 형태) 영화 <카우보이의 노래>이다. 원래 TV 방영용으로 만든 단편들을 감독들의 고집으로 한 편의 영화로 구성했다는 전언이 있었지만, 이는 곧 감독들의 직접 인터뷰로 그저 소문으로 밝혀졌다. 코언 형제는 이 엔솔로지 옴니버스 영화의 이야기를 25년간 차곡차곡 작가의 서랍에 넣어 두었고, 영화로 만들기로 10년 전에 이미 계획해 놓았다고 한다.

코언 형제는 자신들의 영화 인생에서 많은 장르를 섭렵하였다. 누아르, 케이퍼, 뮤지컬, 패러디, 코미디, 스파이, 하드 보일드, 서부극 까지 할리우드에서 상상할 수 있는 대부분의 장르로 자신들의 필모그래피를 채워 놓았다. 그 중에서 ‘서부극’은 철새의 도래지나 연어의 회귀점 처럼, 그들의 영화 족적에 의미 있는 발걸음을 남겼다. 그러나 영화 <카우보이의 노래>는 서부극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각기 다른 이야기들은 모두 개척기의 미국 서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정통 웨스틴 무비의 문법을 찾아볼 수는 없다. 6개의 단편들은 모두 저마다의 장르로 표현되고 화법이나 분위기마저 통일감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를 감상하고 나면 영화는 제법 드라마틱하게 한편 처럼 전개됨을 느낄 수 있다. 그 이유는 각 이야기의 배치가 주는 묘한 불균형 감 때문이다. 영화의 배치는 옴니버스식 구성에서 고심 거리가 되기 마련이다. 감독들은 영화의 배치를 고심하다가 작가의 서랍에 쌓인 순서, 즉 쓰인 순서대로 배치하였다고 한다. 그런 실제의 시간차가 작품들을 극화하였을 때도 묘한 시간 감을 가져다주었는지, 영화는 전체적인 한 편의 서사시처럼 읽히기도 한다.

영화의 원제는 "The Ballad of Buster Scruggs and Other tales of American frontiers(벅스터 스크럭스의 노래와 다른 미국 개척자들의 이야기)"이다. 한국에서 개봉할 경우 한국식 작명을 하는 장고 끝의 악수로 곤혹스럽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영화의 경우 '카우보이의 노래'라는 개명은 제법 많은 고민과 영민함이 보인다. 발라드(Ballade)는 보통 대중음악의 한 장르로 사랑이나 감성 가득한 이야기를 센티멘털한 노래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발라드는 문학의 오래된 한 장르이다. 라틴어 '춤추다(ballare)'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교회나 궁정 중심의 문학에 대비된 민중들의 영웅전설, 연애 비화 등의 담시로 세대에서 세대로 구전 또는 전송된 문학의 형태를 지칭한다. 중세 시대에 등장하여 영국을 포함한 전 유럽으로 크게 번진 '음유시인'의 주요 레퍼토리는 이 발라드 문학이었다. 역사나 전설 등을 소재로 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졌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독일의 괴테, 하이네, 프랑스의 위고, 그리고 영국의 스콧 등이 이 발라드 장르의 작품을 제법 남긴 작가들이다. 이런 이유에서 영화 <카우보이의 노래>를 보고 난 후 다시 되짚어 보면, 제목대로 '노래'가 떠 오른다. 영화 속에 삽입된 노래들 때문일 수도 있지만, 6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단편선을 읽어 내듯 구성된 옴니버스 구성의 이야기는 작은 마을 극장에서 읊조리는 서사시가처럼 들린다. (그래서 그런지 세 번째 에피소드 [밥줄(Meal Ticket)]에서 외진 마을 마을을 다니는 유랑극단의 이야기는 영화 전체와 코언 형제의 영화 인생 전체를 대유 하는 이야기로 다가 올지도 모른다.) 서부 개척시대의 배경이 이 이야기가 낯설지 않은 이유는, 구성이 우리가 태생적으로 접하였던 고유한 문화 장르인 마당극의 그것과 닮아 있어서 일지도 모른다.

 

'낯설게 하기'로 만든 삶의 '그럴 듯 함'

영화를 말할 때, 장르적 특성으로 구별하고 구분하는 경향도 있으나, 개인적으로는 크게 두 가지의 영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는 리얼리즘 영화나 사실에 기반한 영화가 주는 드라마 요소의 영화로 '이야기에 빠져들게 만드는 영화'이다. . 영화를 보는 내내 스토리에 몰입하고 극 중 배역의 입장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작가나 전지적 입장이 되어 내러티브를 관찰하게 되는 그런 영화이다. 아마 대부분의 극영화가 그런 형태로 진행되는 영화일 것이다. 이는 영화에 그럴듯한 '개연성'을 부여 함으로써 실제와 다르지 않은 가상 경험을 전달함으로써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이 된다. 또 다른 하나는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영화입니다'하고 중간중간 스토리 망상에서 "레드 썬" 주문으로 깨워 주는 영화이다. 영화가 몰입감 있게 진행되는 중에 갑자기 배우가 스크린을 마주하고 방백을 하거나, 이야기 사이사이에 친절하게 내레이션으로 부가적인 설명을 해주는 영화들이 그런 것들이다. 박찬욱의 영화나 우디 앨런의 영화에서 시그니쳐로 들려주는 방법들인데, 이는 고전적인 내러티브(서사)의 방법에서 벗어난 것들이다. 코언 형제의 영화들에서도 그러한 장치들이 자주 등장한다.

보통 내러티브의 방법으로는 스토리와 담화라는 방법의 '스토리텔링'이 주로 사용되는데, 이는 이야기를 현재 진행형으로 구성하며, 시간적이며 인과적인 이야기들을 담화로 엮어 내어 청자들에게 쉬운 이해를 도모하는 주요한 수단이 된다. 하지만, 이 방법에는 큰 단점이 있는데, 자칫 흥미나 긴장감이라는 반응을 유발하지 못해 지루해지기 십상이라는 데에 있다. 이런 단점의 보완을 위해 문학적 용어로 이야기되는 '낯설게 하기'라는 기법이 사용이 된다. 낯설게 하기란 이야기로 구성된 작품의 기교성을 대표하는 기법으로 자리 잡고 있고, 그 기교성으로 인해 작품은 예술로 승화될 수 있다. (러시아 형식주의 쉬끌롭스끼 참고)

이 낯설게 하기의 대표적인 방법이 통시적인 서사의 진행을 방해함으로써 사건의 중단을 노리는 것이다. 이는 시간의 불일치, 공간적 구성을 병행 배열하는 방법과 함께 액자 구성, 이야기 속의 이야기로 대표된다. 이런 낯설게 하기의 대표적인 방법이 옴니버스식의 엔솔로지 구성이 될 수 있고, 더욱이 '전설'과 '구술'처럼 들리는 발라드(Ballad)와 테일(Tales)의 연속 구성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내레이션이나 멋쩍은 방백은 미적 경험을 극대화할 수 있다. 이러한 기법적인 요소들은 미적 경험을 최대로 증폭시켜 주기도 하지만, 여러 이야기로 묶인 구성에서 전체 이야기(外話)와 속 이야기(內話)를 동기화시켜준다. 그리고 그 낯설어진 동기화는 묘하게도 현재 진행형의 서사적 내러티브보다 훨씬 강한 '핍진성'이라 일컫는 '그럴듯함'을 던져 준다. 영화 <카우보이의 노래>에서 사용한 낯설게 하기는 이야기마다, 그리고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연결한다. 그 연결된 주제는 바로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살고 있는 자가 죽음을 직면하는 순간에 만나는 현실감 가득한 '느닷없음'이다.

코언 형제의 단편들은 정통적인 웨스틴 무비의 장르적 상투성에서는 많이 벗어나 있다. 여섯 편의 단편은 각기 기타를 치며 유랑하는 경망스럽지만 손 빠른 총잡이 카우보이, 인생의 새옹지마를 몸소 실천해 보이는 억세게 재수 없는 은행강도, 사지가 없는 독백 배우에 의지하며 오지를 유랑하는 극단 마스터, 광활하지만 경탄스럽게 아름다운 자연에서 금맥을 찾다 죽음의 순간을 겨우 넘기는 노인, 정착을 위해 집단 이주하는 도중 유일한 혈육인 오빠를 잃고 무일푼이 된 고지식한 여동생, 시체를 올려 싣고 어딘지 모를 목적지로 향하는 묘한 구성의 다섯 승객의 이야기가 다양하게 진행되지만, 거창한 무용담이나 질퍽대는 복수극은 없다. 먼지 날리는 황량하고 척박한 땅에서 고단하게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의 '그럴 듯 한' 이야기로 담담하게 그려낼 뿐이다. 그 이야기 안에서 담담하게 그려지는 그들의 고된 삶에서 공통적으로 찾아오는 것은 '느닷없는 죽음'이다. 영화 <카우보이의 노래> 안의 여섯 개의 단편에는 모두 죽음이 등장한다.(마지막 스토리에는 직접적인 죽음의 묘사가 없지만 보는 이 모두 죽음을 연상할 수밖에 없으므로 죽음의 등장으로 묶어 본다.)

여섯 개의 죽음은 나름 나름의 순간으로 묘사되고, 그 상황도 사뭇 다르게 그려진다. 손 빠르다 자부하는 총잡이는 직접 머리에 구멍 난 총알 자국을 보며 죽음을 맞이 하고, 교수형 직전 코만치 습격 때문에 살아난 은행 강도는 어처구니 없게도 다시 목메달려 끝을 맺는다. 신기한 능력을 가진 닭에게 밀린 독백가의 죽음은 추운 겨울날 다리 밑 강물에 던져졌을 것이라 추측을 남기고, 어떤 늙은이는 죽음의 문턱에서 극적으로 본인의 등 뒤에서 총을 겨눈 젊은이와 삶과 죽음을 맞 바꾸며, 악재가 덮치고 덮친 끝에 기댈 언덕을 찾은 고지식한 여인은 상황을 오해하여 스스로 죽음을 맞이한다. 이 나름 나름의 죽음에 고만 고만한 것이 있다면, 바로 죽음은 느닷없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예고도 없고, 예상되지도 않으며, 계획대로 진행도 없이 죽음은 찾아온다.

산다는 것은 기쁘고, 노엽고, 슬프고, 노여운 일들의 연속이지만, 죽음은 그저 갑작스러운 종결일 뿐이다. 그 죽음의 순간, 아니 죽음 직전의 순간은 아이러니하게 매혹적(은행강도는 마지막 순간에 이상형의 여인을 발견한다. 그것도 교수대에서)이고 낭만적(금맥을 뒤쫓아 노인에게 총을 쏜 젊은이는 미려한 자연을 잠시 감상까지 한다.)이며 희망적(온갖 우여곡절 끝에 든든한 남자에게 청혼을 받은 상황의 오판으로 여인은 어이없는 선택을 한다.)이기 까지 하다. 그래서 더욱 죽음은 어이없게도 갑작스럽다. 그 갑작스러운 죽음의 묘사는 보통의 내러티브보다 느닷없이 그려지기에 오히려 더 '그럴 듯'하다. 죽음이란 실제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니까.

 

'어차피 죽을 목숨'

영화의 처음 다섯 이야기로 시작한 코언 형제는 마지막 여섯 번째 이야기 '시체(The Mortal Remains)'로 이야기를 정리하는 듯 선문답을 던져 주며 마무리를 한다. 이 에피소드에서 시체를 싣고 가는 현상금 사냥꾼들은 마치 나머지 사람들을 저 새상으로 인도하는 저승 차사처럼 느껴진다. 이들 둘의 이야기와 노래에는 죽음의 느닷없음과 불가역 한 운명에 대한 암시를 던져 준다. 동승한 것이 신기할 정도로 다른 세 사람 (산사 사냥꾼, 중산층 교수 부인, 한량끼의 프랑스인)은 어색하고 불편한 자리에 익숙해 지자, 각자의 경험에서 나오는 확신에 가득한 어조로 이야기를 쏟아 놓는다. 그중에 사람의 부류에 대한 이야기가 격하게 오고 가게 된다. 사람은 한 가지의 부류가 있다는 산사냥꾼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하고 귀족 부인과 나머지 승객들은 저마다의 분류의 기준을 내어 놓는다. 운 좋은 놈과 아닌 놈, 강자와 약자, 때려눕히기 어려운 자와 힘 없이 쓰러지는 자, 죄짓지 않는 부류와 죄짓는 부류 등 저마다의 가치관과 변별 가능한 가치의 잣대로 주장한다.

주장을 굽힐 것 같지 않던 세 사람은 갑자기 맞은편에서 부르는 아일랜드 포크송과 영국 남자가 들려주는 ‘한밤중에 찾아온 손님’에 대한 오싹한 이야기로 순식간에 잠잠해진다. 세 승객의 표정을 살피곤 남자는 “다 아는 이야기지만, 사람들은 이렇게 매번 어린애처럼 정신을 빼앗긴다”라고 옅은 미소로 이야기한다. 그리곤 멈추지 않을 기세로 달리던 마차가 어느 호텔 앞에 종착하자 모두들 깨닫게 된다. 산사냥꾼이 처음 주장한 대로 사람은 족제비나 비버와 다름없다는 것, 바로 죽음 앞에서는 모두 '죽을 운명에 처한 자'들이라는 인생 허망의 절대 진리를 느끼며 숙연해지고 밤은 더욱 짙푸르게 깊어 간다.

'한밤중에 찾아온 손님' 이야기는 코언 형제의 <시리어스 맨>(2009)과 <더 브레이브>(2011)에도 삽입된 이야기 소재이다. 이 이야기는 코언 형제가 생각하는 일종의 종교와 같은 신념처럼 들린다. 성경에서도 한 밤중에 찾아오는 손님에 대한 이야기는 출애굽기의 과월절 탄생 에피소드로 '죽음'의 갑작스러운 무자비함을 묘사하듯, 죽음은 어린아이 손가락 꼽아 기다리는 크리스마스처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본디 성향과 가치관, 윤리적 규범 및 자유의지, 합리적인 선택을 위한 무수한 노력이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구원으로 작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여섯 번째 에피소드의 소제목을 '시체'라고 번역한 것에는 아쉬움을 느낀다. 누군가는 '죽을 자는 남으리라'라고 직역 아닌 직역도 하였지만, 나의 취향대로 의역을 하자면,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 하고 싶다. 'Motal'이라는 단어가 명사로 쓰이면 보통 '(운명이나 숙명에 아무 힘없는) 보통 인간'으로 쓰이는 경우도 많고, 코언 형제의 신념의 메시지를 빗대어 이야기하자면 좋은 소제목이 되지 않았을까 혼자 주장해 본다. 코언 형제의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은 영화적 편집과 촬영으로도 충분히 말하고 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의 밝고 유쾌한 분위기로 시작하여 마지막 에피소드의 음침하고 어두운 분위기 일색의 맺음이나, 에피소드마다 시작하는 첫 시작의 내레이션과 마지막 내레이션의 댓 구는 매우 유의미해 보인다.

"자비란 본디 강요되는 것이 아니오,
그것은 마치 하늘에서 내리는 고마운 비와 같습니다.'

에피소드들을 한편 한편 떼어 놓고 보아도 무척 매력적이다. 이야기 하나하나를 늘이고 첨가해 하나의 극화를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이야기로 다가온다. 영화계에서 자신들의 영화의 색깔을 추구하고, 때로는 비정한 평가에 좌절도 했을 형제 감독들이 서랍에 차곡차곡 쌓아 남긴 25년 간의 끄적임이라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에피소드 하나하나들에 대해 풀어내고 싶은 욕심이 드는 엔솔로지에서 하나만 골라 보라면 떠돌이 유랑극단의 비정한 선택을 그린 세 번째 이야기 <밥줄(Meal Ticket)>을 꼽고 싶다.

에피소드의 내용은 사지 절단된 독백 배우 헤리슨의 일인극으로 연명하던 극단 마스터가 새로운 '돈'이 되는 배우 신묘한 '산수 하는 닭 (The Calculating Capon)'을 만나면서, 밥만 축내고 있는 독백 배우를 버린다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드라마틱한 장치 없이 건조하게 진행된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퍼시 비시 셸리의 <오지만디아스>, 창세기 속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와 <템페스트>, 그리고 링컨 대통령의 게티즈버그 선언에 이르는 장대한 이야기를 암송하여 낭독하는 사지가 없는 장애인은 처음에 돈벌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그런 '옛날이야기'를 끊임없이 낭독하는 늘 같은 형태의 일인극은 인기를 잃어 가고, '밥줄'마저 고민하게 되는 지경이 되고 많다. 변화를 추구하던가 아니면 굶어 죽을 판이다. 코언 형제는 이와 같은 이야기로 자신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고 상업과 작품의 양면을 가진 '영화'에 대한 현실 풍자와 비판을 하고 있다.

 

마블 영화나 대형 프랜차이즈 액션 영화처럼 요즘 영화사들의 주요 업무가 아닌 작품

이 에피소는 그저 '이야기' 그리고 '콘텐츠'가 산업의 논리로 소비되는 이야기꾼의 현실을 담고 있다. 오래된 이야기는 철 지난 소리 같고, 계속 반복되는 고전과 명언들은 이젠 지겨운 동어 반복의 고장 난 라디오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관객들은 좀 더 자극적이며 신선하고 이전에 없었던 무엇을 찾게 된다. 이런 관객의 '니즈'에 발 빠른 마블 같은 영화나 대형 프랜차이즈 영화는 멀티플렉스를 꽉꽉 채우고, 이전의 형태로 만들어진 낡아 보이는 이야기들은 외면받기 일쑤다. 이단 코언은 매체의 집요한 질문에 '애초에 할리우드 영화제작사에 시나리오를 보여줄 생각이 없었다'라고 한다. 그만큼 '돈'이 되지 않는 영화는 세상 밖으로 나오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신묘하게 산수를 하는 닭처럼,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것들이 '돈'의 선택을 받는 것이 영화계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계속되고 '노래'는 또다시 불려져야 한다는 것이 코언 형제의 생각일 것이다. 그래서 코언 형제에게 서부극이라는 낡은 배경의 이야기를 옴니버스 엔솔로지라는 옛 것의 냄새가 나는 틀을 씌워 지속 가능한 플랫폼인 '넷플릭스'에 업로드한 선택은 필수 불가결한 운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느닺없이 죽음이 닥쳐오더라도 그 죽음의 순간이 어찌 될지 몰라도 삶은 계속되듯이, 기존 영화의 틀이 바뀌고 소멸할 운명일지라도(실제 그런 일은 없겠지만), 그들만의 방식으로 영화 만들기는 계속된 것이다.

여섯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카우보이의 노래>는 책을 펼치며 시작하여 책을 닫으며 끝맺는다. 영화의 포스터 문구인 ‘stories live forever people don't(이야기는 영원하지만, 사람은 아니다)’를 떠 올려 보면, 영화 속에 책이라는 장치를 도입한 까닭을 파악할 수 있다. 흔히들 디지털 저장매체의 발전으로 디지털 저장 매체가 더 오랫동안 저장 가능할 것 같지만, 사실은 길어야 10~20년 동안 완전 저장이 가능한 상태가 된다. 하지만, 종이로 만든 책은 생각보다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하다. 보관의 노력과 방법에 따라 '이야기'는 책 속에서 오랫동안 저장이 가능하고 전례 될 수 있다. 포스터를 보면 제목의 캘리그래프에서 뻗어가는 여섯 갈래의 길과 말은 이야기가 사람과 사람에게, 책에서 사람에게, 사람에게서 책으로 전례 되는 모습의 표현처럼 보인다. 이처럼 코언 형제는 '이야기'는 그 서사의 힘이 있다면, 옛 것이든 오래된 것이든 긴 시간 동안 간직하며 전해질 것이라 믿는 듯하다. 그리고 바람이기도 한 듯하다. 그들의 믿음과 바람이 바로 영화 <카우보이의 노래>에 잘 녹아든 것만큼은 확연해 보인다.

 

삶을 위한 죽음의 발라드

보통 영화감독들은 저마다의 색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그 감독을 떠 올리면 생각나는 이미지가 있다. '코언 형제의 영화' 하면, 가치 있을 것 같지도 않은 그렇고 그런 삶에 무의미한 노력을 하다 낭패를 맞닥뜨리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영화 <카우보이의 노래>는 그런 인간 군상들의 허우적거리는 삶에 갑자기 찾아드는 죽음의 순간을 그린다. 황망하기도 하고 어처구니없는 죽음, 조금은 생뚱맞아 보이는 죽음의 전개는 코언 감독이 이번 영화에서 처음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의 죽음들은 대체적으로 극적 긴장감을 단숨에 죽여버리도록 생뚱맞다.) 그런데 죽음이라는 게 원래 삶에선 의미 없는 것이다. 그것이 생생하게 미혹적이든 생뚱맞게 충격적이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카우보이의 노래>에서의 죽음은 자비란 없고 배려란 없이 찾아 올 삶의 '순간'이라 이야기한다. 한 번 사는 삶, 어차피 죽는 인생 뭐 그리 아웅 대며 사는가 하고 등 뒤에서 비웃듯이 말이다.

그러나 코언 형제는 영화적 언어로는 단호하게 윽박지르지는 않는다. 오히려 풍성한 장르적 실험과 에피소드와 에피소드 간의 콘텍스트를 만드는 명석한 편집으로 보는 이의 생각을 움켜쥔다. 그래서 보는 우리들은 뻔한 옛날이야기에 속는 셈 치고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그 뻔한 옛이야기를 영화가 끝나고 난 뒤 일상 속에서 문뜩문뜩 곱씹어 보게 된다. 영화 <카우보이의 노래>는 코언 형제의 최고 걸작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자꾸 생각 나는 옛날 맛집 음식처럼 마음이 가는 영화이다. 그래서 영화 <카우보이의 노래>는 보는 내내 긴장하거나 가슴 울렁거림은 없지만, 보고 나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끌리는 매력이 있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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