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 스페이시의 <유주얼 서스펙트(1995)>가 떠오른다. 영화 <우행록>의 첫 장면은 의례 주입된 인지와 경험의 틀을 주춤 없이 깨버린다. 가십거리와 풍문 취재를 주로 하는 황색 잡지 기자 다나카(츠마부시 사토시)의 등장은 건조하지만 인상적이다. 지친 일상을 마무리하며 퇴근하는 버스에 겨우 자리 잡은 피곤한 다나카에게 참견하기 좋아하는 중년은 서 있는 노파에게 자리 양보를 강요한다. 속으로 내키지 않은 채 사회가 강요하는 겸양으로 자리를 억지로 양보하지만, 그는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중심을 잃고 쓰러지고 만다. 다리를 심하게 절며 정류장에 내려선 다카타를 보는 이들은 혀를 차며 확증 편향된 인지에 비판의 시선을 보내기 마련이다. 그런 흔하디 흔한 판단과 판결의 심증은 곧 무너지고 만다. 다나카는 몇 걸음 옮겨 걷지 않고 건강한 여느 사람처럼 평범한 발걸음을 걷는다. 그의 장애인인 척하는 코스프레는 결국 피해자와 가해자의 시선을 고정관념의 세상에 가두어 두곤, 바로 신랄하게 비웃고 마는 것이다.
‘어리석다’: 슬기롭지 못하고 둔하다.
영화 <우행록: 어리석은 자들의 기록>은 인간의 내면 기저에 자리 잡은 고정된 생각들을 건드린다. 타고난 천성에 양심과 정의라는 것이 자리 잡고 있는 듯이 당연시하는 인간들에게 혼란을 던진다. 인간이 생각하는 옳고 그름의 판단에 대하여, 그 판단의 기준에 대하여 강하게 반문한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진짜 옳은 것이며 잘 못된 것이라고 판단한 것들이 의심의 여지없이 단죄되어야 마땅한 것들인가에 대해 집요하게 따져 든다. 영화는 일본 사회 내면의 어둡고 습하다 못해 썩어 들어가는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누가 ‘삶은 살아 볼 가치가 있다’고 했는지, 양심과 정의의 기준에서 사람들의 삶을 정렬하면 누구나 살만한 세상이 되는지 되 물어 든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리고 당연시하게 받아들이는 양심과 정의의 기준이라는 것이 절대불변의 고정 가치인지, 인간이 스스로 부여한 착각의 터울인지, 아니면 신이 인간에게 주는 심술궂은 퀴즈인지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렇게 인간은 어리석은 존재인 것이다. 슬기롭지도 않으며 민감하지도 않은 것이다. 대학 입시를 위해 외워 두었던 훈민정음에 ‘어린 백성이 니르고져 배 있어도’의 구절을 보면, ‘어리석다’의 옛말은 ‘어리다’로 쓰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리다’가 ‘愚’와 ‘幼’의 두 가지 뜻을 동시에 가질 수 있었던 것은 ‘愚’와 ‘幼’ 사이에 의미상의 유연성이 있었던 데에 기인한다. 즉 나이가 적을수록 경험이 적어 어리석은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100세를 바라보는 수명연장의 고무줄 세상에서 ‘사회적 연령’은 동인하여 변화되기 마련이다. 지금의 나이에 0.7을 곱하면 선대의 사회적 나이가 된다는 말이 있듯, 우리는 나이를 먹고 있으나 아직 어린 상태이기에 중년의 나이에도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는 것 아닐까 싶다.
거짓말이 없어도 항상 진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황색 잡지 기자인 다나카의 여동생 미츠코(미츠시마 히카리)의 사건으로부터 시작한다. 다나카의 부친은 고교시절 아들과 드잡이를 한 후 집을 나가게 되고, 일찍이 두 남매를 버리고 새 출발한 모친은 남남이 되었다. 그렇게 유일하고 실제적인 혈육인 여동생은 아빠가 누구인지 모를 아이를 애써 낳아 방임, 학대하여 사건에 기소된다. 여동생을 면회한 후 무슨 연유에서인지 1년 여 전에 일본 열도를 뒤흔든 어느 중산층 일가족의 미제 살인사건의 취재를 시작한다. 취재를 하면서 죽은 가장 타코우(코이데 케이스케)의 회사 입사동기의 입을 빌어 그의 됨됨이와 살아온 날들에 대해 유추한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사랑이나 신뢰 같은 덕목은 책 속에나 고이 두고 마는 삶을 살아온 듯한 타코우의 과거를 들으며, 죽어 마땅할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가진다. 이후 타코우의 아내인 나츠하라(마츠모토 와카나)의 대학 동기 미야무라(우스다 아사미)를 만나 그녀의 대학생활과 과거의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 유명 사립대학에서 관심을 끌만한 미모로 소위 잘 나가는 이들의 무리에 끼어 다니는 나츠하라는 대학 동기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다. 겉으로는 청순하며 겸손한 듯 지내지만, 결국 금수저들의 무리인 ‘내부자’들에게 끼기 위해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하는 전형적인 목적지향적인 이기주의자로 기억되고 있다. 그런 나츠하라는 어찌 보면 원한을 받을 만한 사람이고 끔찍한 사건을 당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사람으로 여기어진다. 취재를 하며 밝혀지는 타코우 부부의 이야기들은 그들과 어린 딸의 죽음이 안타깝게 여기거나, 그들을 무참하게 살해한 가해자의 행위가 벌 받아 마땅하다고 분개할 지점을 찾기 어렵게 한다. 이 쯔음에서 비참한 모습으로 안타깝게 죽음을 맞은 피해자에 대한 연민과 동정은 온 데 간데없고, 그저 그들의 이기적이고 욕심 가득한 살아온 날에 대한 비판 어린 시선만 남게 된다. 그렇다면 누가 피해자이고 가해자인가?
누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면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아니, 한 사람 자체가 양면성이 있다기보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과 그를 판단하는 인지의 기준이 양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기억은 유한하고, 그 유한함 속의 파편들은 의도하든 의도치 않든 편향된 조합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죽이고 싶을 만큼 나쁜 놈이, 누군가에게는 평행 못 잊을 고마운 은인이 되기도 한다. 비단 사람뿐만 아니라, 그와 연관된 사건과 사연들도 그러하다. 어떤 일들은 치명적인 아픔으로 기억되기도 하지만, 그 일이 다른 이들에게는 이해 가능하고 동조할 수 있는 일로 자리 잡곤 한다. 다카타가 애써 취재한 일 년 전의 미제 살인사건의 기사는 어느 연예인들의 한 밤중 데이트 스캔들로 묻히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살인사건이 셀럽들의 시시콜콜한 연애담보다 중요하고 무거운 이야기가 되겠지만, 생각보다 많은 대중에게는 가볍지만 자극적인 인기인들의 비밀 연애가 더 큰 관심을 던져 주는 것이다. 실제 가십 스캔들에 오르내리는 당사들에게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추억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그런 스쳐가는 한 조각 기억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이들의 생각에 그 모든 것이 들어 있지 않다. 세상이 주는 판단의 기준과 경험으로 쌓아 올린 판정의 가늠은 항상 진실과 동 떨어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에서의 다소 밋밋한 사건의 추적은 새로운 증인들의 등장으로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타코우를 대학 시절부터 좋아했다는 옛 연인은 그가 결코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목적을 위해 여자를 만나고, 그 목적이 상실되면 그 만남도 종료시키는 이기적인 사람은 맞지만 절대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모두 그의 그 이지적인 목적의식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와의 만남의 종결은 그만의 이유가 아니라 저마다의 또 다른 사정이 있다는 것이다. 타코우를 죽인 사람은 그것을 이해 못하는 자신이 이용당한 ‘피해자’라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일 것이라 추정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낳은 아기를 쳐다보며 묘한 시선으로 타코우를 연민하듯 증언한다. 아직 범인을 특정하지 못한 취재의 제자리걸음 중에 나츠하라의 동창이었던 카페 여주인 미야무라가 다시 전화를 걸어온다. 죽은 나츠하라와 대학 시절 함께 다녔던 ‘내부자’가 아닌 친구가 있었다고 말이다. 그 친구는 어릴 적 힘든 경험을 뒤로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고자 유명 사립대학에 진학한 다나카의 여동생이라는 것, 그것을 알고 나츠하라는 ‘내부자’들의 일원으로 공고히 남고자 그녀를 제물로 그 일원의 남자들에게 미츠코를 넘겼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다나카는 그런 연관관계를 유일하게 파악한 카페 여주인을 둔기로 내리치고 사이좋지 않은 그녀의 옛 연인의 소행으로 만든다. 동생을 위한 유일한 혈육인 오빠의 진심 어린 행동일까? 아니면, 타인들은 알 수 없는 또 다른 그들만의 비밀이 있는 것일까? 어찌 되었든 사건으로 죽임을 당한 자와 죽인 자가 있는데, 우리는 그들을 가해자와 피해자로 구분 지어 마음의 단죄를 내릴 수 있을까? 아마도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이 뒤바뀌고 또 뒤바뀌는 혼란에 빠질지도 모른다.
기록은 기억보다 위대하다.
영화 <우행록>은 인간의 무방비한 선입견과 지레짐작에 갑작스레 다리를 건다. 우리가 상식으로 그리고 인지상정으로 생각하는 진행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첫 장면의 케빈 스페이시를 떠 올리는 다나카의 절름발이 코스프레가 그러하고, 정신감정을 위해 찾아든 상담소에서 여동생이 이 모든 사건의 고백과 자백을 쏟아 놓는 장면도 그러하다. 그리고 여자를 이용해 자리를 잡는 처세를 이용하던 타코우도 결국 자신의 능력으로 좋은 직장을 구해 자립했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늘 관성적으로 생각하던 의식의 흐름에 갑작스러운 뒷다리 걸기를 당한 느낌이 밀려온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준이라는 것은 정말 보편타당한 것인지 물음을 던지는 듯 한 이야기의 전개는 잔잔하지만 깊은 여운을 준다.
사람의 기억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중요한 진술이나 사건 혹은 현상들에 대해서 ‘기록’이라는 방법으로 진실에 가까운 객관을 남기게 된다. 그래서 늘 기록은 기억보다 위대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기억이라는 것은 우리의 인지와 관념의 장치를 통해 밖으로 꺼내어진다. 다시 말해 사건과 사실이라는 실체는 인간의 머릿속에 있는 여러 생각의 틀을 통해 변용되고 굴절되는 함수 작용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구나 이성적이라 자부하고 합리적이라 생각하며, 세상의 험한 사건과 복잡한 일들에 혀끝 차대는 나의 기억은 날마다 기도드리는 신의 능력과 동일하지 않다. 그 기억 속에는 늘 ‘나’는 정의롭고 선한 사람이며 인지 바르고 똑똑한 사람이라 남아 있을지 몰라도, 다시 꺼내 본 사실과 진실의 ‘기록’ 속에는 그저 늘 어리석은 사람인 것이다. 멀리 찾을 것 없이 가장 오래된 기록 ‘성경’에서의 사람의 모습, 그리고 역사의 질곡 속에 남겨진 인간의 기록을 보면 한결같이 말해 준다. ‘인간은 참 어리석다’고 말이다.
오랜만에 무거운 일본 영화를 보았다. 영화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은 일본 유명 추리 소설가 누쿠이 도쿠로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러닝타임 내내 어둡고 칙칙한 이야기들과 서스펜스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밋밋한 사건의 묘사는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에 따른 주요한 장치처럼 느껴진다. 일본 사회는 성숙의 단계를 넘어 노화로 가는 사회라 표현되곤 한다. 젊은 이들이 줄어들고 노령인구가 늘어나서가 아니라, 인간 본연의 내적인 선한 본성을 기대하기 어려워지는 사회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활력으로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바라본다면 의도가 되었든 본성이 되었든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기대와 배려를 품어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영화에서도 묘사되듯 현재의 일본 사회는 병들어 있다.
가족은 해체되어 불필요한 껍데기로 남아 있고, 지난날을 함께한 친구, 연인, 동료는 그저 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뿐이다. 거기에 더해 겉으로 고도화된 자본주의에서 오는 풍요로 민주적이고 평등적인 사회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기준으로 계급 지어지고 차등이 당연시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 구조적인 모순을 깨거나 고쳐나가기보다, 그 구조 안에서의 생존은 계급을 뛰어넘거나, 나에게 근거 없이 이득이 되기도 하고 이유 없이 가해가 되기도 하는 상급 계급에게 순종하는 것뿐이다. 이런 일들이 어찌 일본만의 일이겠는가. 요즘 미디어는 물론 실생활에서 넘쳐나는 ‘인싸’와 ‘아싸’의 구분은 우스개 소리를 넘어 담론이 형성되어 간다. 어떤 기준으로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를 구분하는지 저마다의 설명은 각양각색이지만, 한 가지 공통된 점은 세상의 욕구, 세속적인 기준인 ‘있어 보이는 무엇’에 따른다는 것이다. 그런 기준의 타당성을 떠나 이미 우리는 어떤 사실과 그와 연관된 사람에게 서로 다른 시선으로 머물며 그저 통념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판정하고 만다. 이 지점에서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실인지 가려내기란 어려운 일이 되어 버린다. 누구도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모든 이는 가해자이며 피해자가 되고, 아무도 가해자이지도 피해자이지도 않은 것이다. 바로 이 사회가 이 세상이 유일한 가해자로 남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영화 <우행록>이 이 시대에 조응하는 이유이다.
병폐적 사회와 우매한 인간의 이중창 – 깊은 생각을 주는 일본 영화
<심야식당>으로 잘 알려진 일본의 명품 각본가 무카이 코스케가 각본을 맡았고,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워터보이> 등으로 익숙한 배우 츠마부키 사토시가 살인사건을 취재하는 기자이자 비밀스러운 남매의 오빠 다나카를 연기한다. 주름 깊어진 동안이 주는 의미만큼 한 층 깊어진 그의 연기 스펙트럼을 보는 것도 좋은 시간이 된다. 그 밖의 배우들의 열연도 극 속에 몰입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문제는 이런 잘 만들어진 영화를 극장에서 쉽게 접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한국영화가 성장한다고 하지만, 일본의 영화가 가진 장르적 다양성과 문학작품과 조응하는 깊이 있는 작품성에 대해서는 주목할 필요가 여전히 있어 보인다. 영화가 산업의 도구로 재화를 창출하는 것을 넘어선 ‘Beyond entertainment’에서의 고민은 한국의 영화에서 많이 부족해 보인다. 깊은 생각을 가져다 줄 영화 <우행록>, 한 번쯤 들여다 보기를 권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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