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더 원더(2022, The Wonder)] 가장 큰 기적은 '살아 내는 것'

더 원더. 스틸컷=넷플릭스 예고편

1862년 대기근이 휩쓸고 간 아일랜드 한 마을에는 '기적의 소녀'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4개월 동안 아무 음식을 먹지 않은 채, 비교적 건강한 상태로 살아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금식 소녀 애나(킬라 로드 캐시디)에 대한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퍼져나가면서 기적 신앙 관광객들마저 몰려듭니다. 이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취재하기 위해서 작은 마을에 파견됩니다.

여러 의도에 의해, 이 소녀에 대한 관찰과 검증 위원회가 출범되고, 위원회는 크림 전쟁 참전 영국 간호사 리브(플로렌스 휴)를 고용합니다. 그녀의 임무는 2주 동안 환자를 돌보며 건강 상태를 그저 '관찰'하는 것입니다. 전쟁의 경험과 개인사 때문에 신앙보다 이성이 앞선 그녀는 이 사건이 기적인지, 교묘한 사기인지 확인하고만 싶어 집니다. 거리를 두고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던 리브는 애처럽고 맘이 쓰이는 소녀 애나를 둘러싼 어른들의 위선과 추악한 진실에 대해 알게 되는데. 리브는 진실을 밝힐까요? 기적의 소녀의 운명은 어찌 될까요?

원작 책과 영화 (사진=알라딘, 넷플릭스)

산업혁명, 아일랜드 대기근, 크림전쟁

<더 원더>가 넷플릭스 영화로 스트리밍 되고 있습니다.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는 부커상 수상작이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룸>을 쓴 엠마 도너휴의 2016 작품입니다.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의 작가는 대기근 시대에 소문처럼 퍼졌던 '단식 소녀'를 모티프로 이야기를 꾸렸습니다. 영화는 <판타스틱 우먼(2016)>으로 주목을 받은 아르헨티나 출신의 세바스찬 렐리오가 감독을 맡았습니다. 여성 작가의 소설에 충실한 미장센을 만들어 내고도 모자라, 화자가 개입하고 세트장의 안과 밖을 부러 노출하는 등, 문학의 익숙한 '낯설게 하기/소격 효과'를 부각하기도 합니다. (이는 주제와도 맞 닿아 있지요. 후술에)

영화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역사적 사실을 짚고 가면 도움이 됩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산업 혁명, 아일랜드의 대기근, 그리고 크림전쟁이 그것들입니다. 산업혁명은 획기적인 역사의 전환점을 만든 영국의 유일한 발명품이라는 농담이 있듯이, 당시의 산업을 바꾸고 노동의 환경과 당시 민초들의 삶을 흔들어 놓은 쓰나미가 되었습니다. 그것의 폐해를 직격으로 맞은 아일랜드는  고난의 연속이 계속됩니다.

 

굶주린 이들에게 만나 같은 기적이란

아일랜드에는 세 번의 기근이 있었습니다. 그중 1847~1852년에 일어난 두 번째 기근을 가리켜 '대기근(Irish great famine)'이라고 부릅니다. 아일랜드 감자가 '페루 진균'으로 인해 병들어 싹이 말라, 주식으로 먹던 아일랜드 땅에 굶주림과 죽음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시기입니다. 감자 농사는 신이 망쳤지만, 대기근은 영국이 만들었다는 존 미첼(영국의 자연 철학자)의 말처럼 근본 원인은 '영국의 수탈'이었습니다.

아일랜드 대기근을 묘사한 유명작 "Gorta[2]", 릴리안 루시 데이비슨(Lilian Lucy Davidson)의 1946년 작품 (그림=나무위키)

영국은 산업혁명이라는 큰 세상의 변화를 만들고, 세계 제국 건설의 야심을 드러내고 식민지 구상을 합니다. 그 실험 무대가 바로 지척에 있는 아일랜드 섬이었습니다. 현지의 정치체제를 무력화하여 수탈의 기본이 되는 플랜테이션의 테스트 베드였던 것입니다. 소작농으로 전락한 아일랜드인들의 주식 감자가 병들고 역병까지 몰아치자 800만의 인구는 600만으로 줄어들 정도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아일랜드 인구가 670만 정도이니, 이때의 인구 이탈이 아직 회복되지 않은 것이지요.

물론 죽어 떠난 이들도 많지만, 실제 섬을 떠나 새로운 환경을 찾아 떠난 이민들이 급속히 늘어났습니다. 미국의 아일랜드계가 이때의 이민이고, 죄인들의 유배지이자 새로운 식민지인 호주와 뉴질랜드로 떠났던 것이지요.  독립 당시 인구가 400만 정도였다니 얼마나 많은 시람들이 살기 위해 고국 땅을 떠났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영화는 대기근 직후의 기력을 잃은 아일랜드 섬을 보여 줍니다. 원작 소설은 대기근 한창인 1850년이 배경이지만, 영화는 기근 후에도 좀처럼 삶의 활력을 느끼지 못하는 칙칙한 섬을 그려 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갑작스러운 일확천금, 신분의 상승이 아니라, 먹지 않아도 살아 내는 기적이라는 것이지요. 그저 꾸역꾸역 살아낼 힘만이라도 간절한 것이 가난의 진짜 모습이니까요. 사기이든 기적이든 그들에겐 하늘의 만나로 4개월째 살아내는 애나의 존재는 그 자체로 희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신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구한다

간호사 리브는 이 모든 것이 가짜이고 속임수라 생각합니다. 그녀의 상식과 경험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잉글랜드에서 온 기자 윌(톰 버크)과 함께 이 소동의 실체와 진실을 밝히고자 도모하기도 합니다. 마을 사람 중 몇몇 일부도 진실을 규명하고 거짓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장 궁지에 몰린 이들은 이성보단 신앙에 기대기 마련입니다. 거거에 종교 지도자와 지배층들은 부러 그러는 것인지 몰라도 자기만의 확증적 편향이 굳어져 있습니다.. 결국 간호사 리브는 ‘관찰’이 진행되는 2주간 부모조차도 접촉하지 못하게 차단하고 맙니다. 4개월 동안 굳건히 버티던 애나는 급격히 쇠약해지고 심지어 점점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죽어가는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리브는 고민 끝에 엄청난 결정을 내립니다.

애나, 윌, 리브 (사진=네플릭스 스틸컷)

 

영화에서는 남성들 보다, 여성들이 더 무게감 있고 의미 있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특히 영국에서 파견 온 간호사 리브는 크림전쟁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배테랑입니다. 나이팅게일의 후배라는 간접적인 명성과 경험은 그녀를 쉬이 감정에 휩싸이지 않게 해 주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전쟁 중 하나인 크림전쟁은 그녀에게 삶과 죽음이 집 대문의 안과 밖처럼 대단한 구분이 없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2시간 전만 해도 고결하거나, 비열하거나, 가지가지의 꿈과 욕망에 차 있던 사람들이, 몇 백의 사람들이, 이제는 피범벅이 된 굳은 손발을 팽개친 시체가 되어, 능보에, 참호에, 이슬이 촉촉이 내린 꽃이 만발한 골짜기에, 세바스토폴의 장례 교회의 마룻바닥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똘스또이 <세바스찬 폴>-

전쟁은 인간의 신앙을 강하게 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쇠퇴하게 하거나 무신론자를 양산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꼭 나쁘게 세상에서 작용하지는 않습니다. 맹목적인 믿음이 가려 버린, 신이 주었을지도 모를 인간의 유일한 비교 우위인 '이성'이 발동하게 되니까요. 신앙과 이성, 삶과 죽음, 그리고 진실과 거짓은 동전의 양면 같은 등을 맞댄 한 몸일지도 모릅니다. 그 결정과 결단 또한 인간의 몫이고 그것을 '의지'라그 칭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굶주린 이들은 마음이 가난할 수 없다

리브가 애나를 살리고자 하는 것은 신앙과 종교의 측면에서 그 기적을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생각을 우리는 흔히 '전근대적'이라고 하지요. 이성보다는 신앙과 무형의 전례 가치가 작동하던 시대에서 이성과 과학의 증거가 그 진리를 뒷받침하는 시대로 전환되는 그 시기의 이야기가 보여 주는 시대의 충돌입니다. 리브가 전근대성을 탈피한 이유는 참혹한 전쟁의 참상을 경험한 것도 있지만, 3주 하고 이틀을 끝으로 그녀를 떠난 아기의 흔적도 한 몫했을 것입니다.

극도의 가난에는 빵 (스틸컷=넷플릭스)

 

마음이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며 2천 년 전 예수는 산상에서 설교합니다. 그러나 굶주린 자들은 마음이 가난할 수가 없는 법입니다. 마음이 늘 북적거리고 시끄럽습니다. 오늘 하루는 어떻게 버틸까, 내일은 혹시 한두 푼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낼모레의 독촉은 무슨 핑계로 미루어 볼까 하는 궁리와 구실의 실타래가 마음 한가득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극도의 가난은 광야의 만나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궁핍은 기도와 기적의 바람만으로 지울 수가 없는 것이지요.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기적은, 결국 아이를 굶어 죽게 만드는 희대의 사기극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의 직접적인 치유를 위해서는 빵과 우유가 필요한 것이지요.

영화에서 신문기자 월이 애나에게 소마트로프를 선물합니다. 소마트로프는 원형 디스크에 각기 그림을 그리고 양쪽에 실을 달아 잡아당기면 그 탄력으로 앞뒤로 회전하게 되는데, 마치 한 장면처럼 착시가 드는 일종의 영화의 초기 버전 장난감입니다. 윌이 준 소마트로프에는 새와 새장이 그려져 있는데, 이를 보고 '안.. 그리고.. 밖'이라며 안팎을 기도처럼 되뇝니다. 이는 신앙과 이성, 진실과 거짓, 그리고 삶과 죽음의 양면을 이야기해 주는 듯합니다.

소마트로프 (GIF='아란들의 맛진하루' 네이버 블로그)

애나의 결말은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완전한 새로움으로 그려집니다. 어린 시절, 역시 어린 오빠에게 당한 성폭력은 사랑으로 둔갑되고, 죄지은 아이가 되어 먼저 떠난 오빠의 지옥에서의 구원을 통해 33번의 구원기도를 올려야 하는 조작된 기적의 애나는 죽습니다. 그러나, 안과 밖의 진실을 알게 되고 공감하고 조력해 주는 리브 덕분에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납니다. 기적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합니다.

1862년 아일랜드에서 벌어진 사건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개념과 담론이라는 그럴싸한 확신에 갇혀, 실재하는 우리 주변의 호소는 제대로 듣고 있는지 말이지요. 전쟁과 역병의 위기감이 지금 윌에게도 먼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짜 '이성'의 축을 확장해 이 위기를 맞서 낼지, 아니면 그럴듯한 담론들의 향연에 도취되어 말잔치에 빠져 있지도 않을 '기적 같은 도약'에 갇혀 버릴지 말이지요.

대영제국 전역에서  매일 밤 아이들이 도랑과 시궁창에 누워  죽어가지 않는가.
모든 평범한 어린이에게서 기적을 보기엔
너무 굶주린 비통한 세상의 탓이여.
-영화 속 윌의 기사-

 

 

영화의 화자는 애냐의 친척 벌인 문맹이었던 여성입니다. 애나에게 글을 배우곤 해서, 마지막 장면애 신문기자 월의 기사를 띄엄띄엄 읽습니다. 비통한 세상에도 작은 기적들은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글을 읽고 쓰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각자의 위로가 되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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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말)

제목 the Woder는 명사로 '경이로운 것'이라고 읽힙니다. 그런데 의미를 확장하면 wonder는 동사로, '궁금해 하다', '알고 싶어 하다'로 쓰이니 영화를 보면서 명사와 동사가 교차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장센은 그 시대를 담은 사실화 같은 느낌이 듭니다. 아마도 전체적인 소격효과를 위한 세트라는 이미지 때문이겠지만, 자꾸 빈센트 반 고흐의 <감자를 먹는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대기근과 칙칙함이 주는 이미지이겠지요.

반 고흐 <감자먹는 사람들> (그림 캡쳐=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