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올빼미>는 ‘역사극’이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의 인조 편에서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는 아주 간략한 기술을 보고 서사적 상상력을 더해 만든 서스펜스를 유지하는 미스터리 소동극이다. 조선의 왕들에 대한 평가는 여러 모양이지만, 형편없는 군주로 인조를 뽑는 데에는 반대가 쉽지 않다. 그 정도로 인조는 모든 면에서 부족하고 모자라며 나쁜 왕이었다. 그런 인조 시대를 다룬 이야기는 보통 인조 때에 겪었던 조선의 수모인 호란을,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을 이야기하기 십상이다. 2017년에 개봉한 영화 <남한산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 속의 인조는 생각보다 괜찮은 모습으로 나와서 실망하기도 했다. 영화 <올빼미>는 그 후 8년의 일을 다룬다. 후금(청)의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가 8년 만에 귀국하는 시점의 이야기다.
이 시기의 조선은 명과 청에 대한 관계에 대해 여전한 논쟁이 깊어진 시대였다. 호란으로 인해 수모를 겪은 인조는 명을 섬겨야 한다는 마음이 강해졌다. 그러나 조정의 실세인 서인들은 실리를 따라 청나라를 섬겨야 한다는 주장이 연일 맞서고 있었다. 인조의 명에 대한 생각은 단지 통치 이념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이 왕권을 쥐게 된 이유가 정통성이 없는 찬탈, 일종의 쿠데타였기 때문이다. 자기 숙부인 광해군을 치고 정통성 없는 자신이 왕권을 쥔 이유가 명나라가 그토록 중요시하던 ‘유교’에서의 명분이었으니까 말이다. 광해군의 ‘폐모론’에 대한 쟁송이 결국 광해군을 왕의 계보에서 지워버리고 자신이 적통의 군주가 되었기 때문이다.
역사의 주인공은 일상을 일구는 사람들
<남한산성>에서 보여준 척화와 화친의 대립과 선 굵은 명제에 대한 담론은 <올빼미>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그 시대의 주요한 사건이라면 사건인 일을 다루면서도 이야기의 중심에는 거대 담론이 없다.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개인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오히려 되묻는 작품이다. 그 이야기를 천한 집안 출신 주인공의 하루살이로 보여주는 감각은 오히려 거대한 역사적 담론을 펼쳐 놓은 호화찬란한 대형 작품보다 기민하고 영리하다.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침을 잘 놓는 경수(류준열)는 심장 질환으로 고생하는 열 살 동생을 위해 출세를 하고자 했다. 그러던 중 어의 이형익(최무성)에게 발탁되어 궁으로 들어간다. 그의 침술이 인정받았고 더욱이 경수는 눈이 먼 소경이었기에 권력의 틈에 서 있는 누군가에게는 요긴하게 사용될 도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궁에서는 병자호란으로 청(후금)에 인질로 잡혀갔던 소현세자(김성철)가 돌아오면서 묘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역사적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그저 이 긴장감으로 표현되는 것이 이 작품의 묘미다.
한 가지 비밀 아닌 비밀이 있다면, 경수는 낮에는 잘 보지 못하지만, 밤이 되어 어두컴컴해지면 조금 볼 수 있는 주맹증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영화의 제목인 <올빼미>를 이야기하는 이유처럼 보이는데, 사실 올빼미가 낮에 잘 보지 못한다는 인식은 잘못 알려진 이야기다. 올빼미는 포유류 같은 반사판이 없어서 밤에 눈이 빛나지 않는 특징을 지니고 있지만, 밤에는 물론 낮에도 잘 보인다고 한다. 다만 밤에 활동하는 특성상 그런 이야기들이 돌았다. 영화의 제목 <올빼미>는 이런 대표적인 야행성 조류의 특징에서 차용한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다른 의미도 충분히 읽어 낼 수 있다.
서구에서는 올빼미를 지식의 상징으로 여긴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올빼미는 지혜의 상징이었다. 독일 철학자 헤겔의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라는 말에서 나온 부엉이는 사실 올빼미다. <곰돌이 푸>에서도 항상 올빼미 박사에게 지혜를 구하는 질문을 하곤 한다. 반대로 일본을 제외한 동양 문화권에서는 전통적으로 매우 부정적이다. 올빼미는 고금을 통틀어 ‘불인(不仁)과 악인(惡人)’의 상징으로 치부되었다. 어미를 잡아먹는다는 흉악한 가짜 뉴스가 한몫하였다. 이런 이유로 올빼미를 이야기하는 한자어 효(梟)자는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다.
죄인의 목을 베어 저잣거리에 내거는 것을 효수(梟首)라고 한다. 효수형은 참수형이나 거열형으로, 반역 같은 매우 큰 죄를 지은 죄인에게 부가되는 일종의 사후 형벌이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는 곳에 매달아, 중대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하는 효과를 유도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가 역적질이나 권력에 대한 도전과 저항을 경고하는 일이나 전쟁 중에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한 방도로 쓰였다. 또한 효웅(梟雄)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능력은 좋으나 인성에 논란이 있는 인물을 일컬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삼국지의 유비와 조조다.
이처럼 ‘올빼미’에 대한 비유적 의미는 다채롭다. 영화의 모티프가 소현세자의 죽음이라는 사건과 그를 유발한 무위한 정쟁들에 대한 ‘눈먼 자’들에 대한 이야기라서 우선 직접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주인공이자 천한 신분 침구사의 실제 주맹증에서 비롯된 어마어마한 사건에 대한 진실과 사실이 얽혀 있는 하룻밤의 이야기를 함축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보아도 못 본 체, 들어도 못 들은 체하라’는 진실을 은폐하고 감추려는 탐욕스러운 권력의 또 다른 모습이 그려진다.
역사는 거대한 무엇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조선 27명의 왕 중 가장 무능하고 교활하며 악한 왕이 인조라는 평가가 있다. 인조가 그렇게 평가받는 데는 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한 것에서 출발했고, 그런 취약한 정당성을 유지하는 데에 강박적으로 대응한 26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조는 자신의 삼촌뻘인 광해군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북악산 기슭 홍제천에서 칼을 씻고 삼각산을 넘어 일종의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 시작이 이미 문제였다.
인조가 광해군을 칠 때 두었던 명분은 선조의 두 번째 정실인 인목왕후와 그 아들 영창대군을 죽였다는 ‘친족 살해’를 들었다. 그러나, 실록에서는 생략되고 간략 되었지만 자기 아들인 소현세자는 물론 그 세자빈의 일가, 더 나아가 원손이었던 석철까지 계속 죽이려 하고 유배까지 보내고 결국 쓸쓸히 죽게 했다. 말 그대로 피 터지게 싸운 당파싸움은 아이러니하게도 인조 시대부터 지속된다. 그 지속의 방법은 그가 선대의 군주를 내몰았던 수단의 거듭이었다.
영화 <올빼미>의 탁월함은 이런 거대한 역사적 사건과 이데올로기를 주인공 삼지 않은 데에 있다. 거대 사건을 ‘배경’으로 깔아 둠에도 그 역사적 함의가 영화를 보는 중에, 보고 난 후에 진하게 남는다. 상호의 텍스트를 굳이 꺼내어 들지 않아도 영화가 그리는 ‘하룻밤의 일’을 감을 잡아 유추하면서 당시 시대의 무게를 느끼게 하고, 실체적 진실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과 답을 서로 주고받게 만든다. 특히 영화의 서스펜스는 범인을 찾는 스무고개가 아니라, 이미 범인이 누구인지 목격한 목격자의 입장에서 이 진실과 사실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는가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전이된다. 잘된 서스펜스는 이런 것이라고 보여 주는 듯이 여전히 미궁을 헤매는 등장인물들의 허둥지둥을 여과 없이 내어놓는다. 그냥 하룻밤의 소동을 그대로 보여 줌으로써 충분하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역사라는 커다란 책의 주인공이 꼭 권력자여야만 하는지, 무언가를 쟁취한 승자여야 하는지, 그로 인해 역사는 결국 그들의 입맛에 맞게 변질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그리고 역사의 잘못된 선택이 결국 그다음 세대의 악성 유산으로 남아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고 만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학자들은 인조를 조선 왕조의 분기로 본다. 시기상으로도 그러하지만, 인조 이후에는 모두 인조의 혈손들이 왕을 이어갔다. 효종부터 순종까지 모두 인조의 직계 후손이 되니 말이다.
늘 ‘정치’와 ‘도덕’은 갈등한다.
개인의 도덕률이 이전보다 우선시되는 작금에는 영화에서 주는 긴장감이 의미 없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상은 여전하다. 선거와 공천만 보아도 그러하다. 다수의 결정에 개개인이 다 동의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정치적 작용은 동의하기 어려운 개개인이 순응해야 할 도덕적 동기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
‘고귀한 목적을 위해 비도덕적 방법이 필요할 때 정치인의 선택은 어떠할지’, ‘기만과 협잡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부류에 도덕적 고결함으로 항변할 수 있는지’ 같은 이런 질문은 소크라테스 이래 정치 철학사의 가장 중요한 문제이자 가장 난해한 물음표다.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현실감’이 부족하다는 비난을 받기 마련이지만, 한 명의 절대자가 통치하던 원시 왕족 국가에서도 정치적 능력만큼이나 도덕적 자질은 중요하였다. 그만큼 도덕과 정치의 상관관계는 간단한 방정식은 아니다.
일반적인 도덕률이 정치 행위에도 반드시 적용되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정치 행위에는 ‘공공선’ 또는 ‘정치적 이유’에서 도덕성을 넘어서는 나름의 기준이 있는 것일까? 도덕만이 완전한 기준이라고 여긴다면, 정치적으로 ‘필요’한 행동들 모두가 이기적 욕망이라는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반대로 도덕적 완전함이라는 요구를 단지 ‘비정치적’이라는 이유에서 무시하는 것은 권력의 아집만 강화한다.
정치를 앞세워도 그 행위가 ‘보편적 가치의 부재’나 ‘세렝게티의 법칙’으로 귀결되지 않을 수 있는 방식을 찾아가는 과정이 정치의 진보라고 생각한다. ‘정치’와 ‘도덕’의 화해는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이 이념적 경계와 이론적 편견을 넘어설 때 가능하다. 그런데 최근 대통령이 하는 일은 이런 논의에서 벗겨 나 있다. 과연 그의 행위가 ‘정치적’인 행위인가? 그의 자리가 정치적인 성격을 지닌 선출직이라 하지만, ‘정치적’ 행위보단 ‘행정 공무적’ 행위를 하는 행정부의 최고 직책이다. 그런데도 정치인이라고 치자. 그의 일련의 행위에 대한 비판에 대한 옹호가 공공의 이익을 위한 불가피한 ‘공공선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정치 행동’에 기인한 것인가에 대한 답을 쉽게 할 수 있을까?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정치가 도덕의 덫에 걸렸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도덕’과 ‘정치’의 근본적인 갈등의 문제처럼 이야기한다. 그가 과거의 역사를 부정한 채 자신의 정치적 공적을 위한 졸속 처리의 외교가 개인적 이익을 도모한 것은 아닐까? 모든 행위를 ‘법적 조치’로 밀어붙이는 일들은 어떤 면에서 공공선을 위한 정치적 행위인가? 모두 궤변이다. 나는 이유가 있고 상대는 변명만 있다는 기준은 어처구니없다. 모든 잘못은 내가 아닌 상대에게 있다는 해명은 구질구질하다.
영화 <올빼미>는 좋은 ‘이야기’를 내놓았다. 역사적 개연성이나 결말의 시원치 않음에 실망을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영화는 제법 지난 역사를 다루면서 좋은 작품들과 조응하고 있다. 우선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생각났다. 수도원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조사하는 일을 풀어내지만, 정작 살인은 하나의 맥거핀이 되었다. 절대 가치라고 여기는 맹신의 도그마가 저지른 엄청난 부조리의 폭압을 고발하고 있었다. 1993년 소설로 발표되어 베스트 셀러가 되어 1995년에 영화로 개봉한 <영원한 제국>도 떠 오른다. 정조의 부친 사도세자의 죽음을 은폐하려던 노론의 세력과 정조의 대립을 규장각 서사의 죽음으로 풀어 가는 이야기로 제법 화제가 되었다. 물론 정유역변을 다룬 <역린>도 스쳐 지나간다.
“나는 보았습니다."
주맹증의 천경수는 어려움과 압박 앞에서도 진실을 고함을 숨기지 않았다. 요즘 흔한 말로 ‘할많하않’이라는 줄임말이 있다.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다. 상대방과 의사소통이 불가능함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비겁한 변명처럼 들릴 수도 있다. 천경수가 ‘보았다’라고 이야기한 것은 시각으로 인지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내가 본 것을 진실하게 세상에 알린다는 의미다. 천경수는 세상 존엄인 왕이 겁박하여도 일곱 번이나 ‘나는 진실로 보았습니다’라고 외친다. 거기에 대고 왕은 ‘소경이면 소경답게 눈 감고 살아라.’라고 겁박한다. 결국 시간이 지나 왕이 강박과 중풍에 시달려 다 죽어 갈 때 가장 유능한 침구사가 된 경수는 왕에게 되묻는다.
“무엇이 보이십니까?”
영화 <올빼미>는 침묵하면 손해는 보지 않는다는 말이 만사가 된 지금 세상에 대한 은유다. 더욱이 경수가 참수 직전에 올려다본 역적 죄인들의 참수된 머리는 효수(梟首)라는 올빼미의 의미를 담고 있다. 멋진 비유다. 올빼미는 오해로 인해 좋지 않은 이미지로 남았다. 그 이유는 어두운 시간에 일어나는 진실을 그대로 보는 특성과 그것을 보았다고 고하는 속성이 권력을 가진 이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까닭은 아닐까. 본 것을 보았다고 고하지 못하는 모두가 그저 진실에 눈먼 소경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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