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석요를 팔아라
1990년대 중반의 일이었다. 군을 제대하고 복학하기까지 시간이 어중간하게 남아 있었다. 무리하게 중간 복학을 하느니 학기의 시작을 여유롭게 보내려는 생각 반, 등록금과 각종 지출에 대한 걱정 반으로 하루를 아르바이트로 가득 채웠던 때였다. 그때 과외를 7건의 11명을 하고, 성당의 사무보조를 하며, 저녁에는 아는 지인의 ‘투다리’에서 꼬치를 굽고 자리를 정리 청소하며 지내던 날들이었다. 그런데도 불구 부친이 쓰러진 뒤 남은 집안의 부채와 생활비에 장학금으로 커버가 안 되는 각종 학업 비용을 마련하기에는 매우 부족했다. 그때 방법을 찾은 것이 건설 노무였다. 노가다라고 하는 막일을 시작했고, 제대 군인에게는 어렵지 않은 일들로 꽤 두툼한 일당을 챙길 수 있었다. 그때 대학 동기에게서 전화가 왔다.
청주가 고향인 이 친구가 이르기를 자기 고향에 좋은 건설 현장이 있는데 장기간 숙식이 가능한 인력이 필요하다는 제안이었다. 망설일 필요 없이 친구와 함께 청주에 가기 위해 양재역 부근의 약속 장소로 향했다. 도착한 장소에서 얼마 걷지 않아 친구는 작은 건물 안으로 나를 들여보냈다. 그 곳에서 들고 온 옷가지며 짐들을 맡기라는 재촉에 그리하고 강당 비슷한 곳으로 들어갔다. 의자가 오와 열을 맞춘 크지도 작지도 않은 강의실은 나와 같이 어리둥절한 표정의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 감이 왔다. ‘이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강사인지 간부인지 하는 사람의 설교도 아닌 강의도 아닌 말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곳은 ‘자석요’로 유명한 ‘SM-숭민 코리아’의 지부 사무실이었다. 다단계 모집을 위한 장소였다.
당시의 생각을 다시 하더라도 그리 유쾌한 생각들은 없다. 비슷한 나이의 복학생, 휴학생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집단 교육으로 자신들의 사업이 얼마나 유망한 미래를 열어 주는지 머리에 새겨 넣기 바쁜 곳이었다. 내 지랄 같은 성격을 감사한 때이기도 했다. 한없이 의심 가득한 성향은 부친의 연대 보증 후 부도로 더 심해졌다. 아무도 믿지 않았고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매사에 실눈을 뜨고 비판보다 심한 의심을 하던 때였다. 찢어지게 힘든 날들이었지만, 그 말들이 내게 당장 등록금과 생활비를 주지 않는다는 사실은 자명해 보였다. 친구와 그곳 간부에게 모친을 당장 만나 구매 할당을 마련하겠다 속이고 모든 옷가지를 놓고 그곳을 나왔다. 나오자마자 친구 녀석에게 욕지거리 전화를 하고 짐을 보내라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그곳에 남아 자석요를 사고, 팔고, 살 사람과 팔 사람을 모집하고 하는 일들을 지속했다. 복학 후 만난 친구 녀석은 짙은 양복의 가슴에 빛나는 배지를 달고 사무실로 나를 초대했다. 성공했다는 듯이 자신의 ‘네트워크 비즈니스’를 또 팔려 들었다. 나는 다시 욕을 하고 나오고 말았다. 내게 그 정도도 마련할 여유와 주변머리가 없었음을 감사하는 날이 머지않아 찾아왔다. 결국 유사 수신 및 사기 혐의로 그 친구는 입건이 되었고, 정상 사회로 복귀하는 데 제법 시간이 소요되고 말았다. 20년이 흘러 만난 친구가 말하기를 ‘그때 사고팔려고 했던 것은 자석요가 아니야. 내 욕망이랑, 남의 욕망이지. 그것이 결국 믿음이라 포장되더군.’이라는 노스님의 깨달음 같은 당연한 이야기로 그때를 회상했다.
"믿음은 그저 믿는 것이다. 이해되거나 설명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 신이 배신한 사람들>을 보았다. 총 8부작의 시리즈는 한국에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유사종교- 사이비 종교와 관련한 르포르타주를 엮어 내었다. 맨 앞을 장식한 JMS의 교주 정명석 때문에 여러 논란과 충격을 주었고, 특히 그의 변태적인 성범죄와 그 상세한 묘사로 여러 이야기가 떠돌았다. JMS는 대학 시절 학생회를 운영할 때부터 골치를 잡았던 존재라 잘 알고 있는 이야기다. 그 사이비 사기 행위에 대한 관심보다 그 사기 행위에 걸려든 사람들에 대한 생각들로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특히 다큐멘터리 콘텐츠는 완성도 있는 르포르타주라기보다, 자극적인 고발만 있었기에 마음은 더욱 복잡해졌다.
사이비라는 말은 사실 매우 철학적인 이야기다. 그런 철학적 명패를 붙여주기에 이 사이비 교주들의 행각은 너무나도 저열하다. 그냥 수준 이하 짓들의 종합이다. 한 사람의 인생, 한 가정의 행복, 그리고 한 마을의 생존을 빼앗아 가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그 현상과 현실을 고발하고 폭로하는 것은 그것을 바로 잡을 첫걸음일지도 모른다. 이번 다큐가 파급력 있는 넷플릭스에 스트리밍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사회는 바뀐 것이 없다. 사각은 애매한 계층이 아니라 지금 당장 ‘위급’한 이들에게 발생한다. 집을 잃어 내쫓기게 된 사람들, 학교에서 왕따당한 외톨이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 간절한 병든 사람들. 아직 이 사회는 이런 주제는 ‘남의 일’처럼 감성과 공감의 이야깃거리로만 여기고 있다. 충격적인 공포와 그 뒤에 오는 연민과 적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온갖 기독교 기반 모금단체의 ‘빈곤 포르노’처럼 말이다. 대안도 없고 해결의 의지도 없다.
언론과 미디어, 그리고 뉴미디어라고 주창하는 플랫폼 운영자들이 이 부분을 채워 주길 희망한다. 그저 자극적인 폭로는 흥미로울 수는 있지만, 일상과 거리가 있다. 보다 우리 일상의 어둡고 아픈 곳을 차갑고 냉정하게 조명하고 분석하며, 대안까지 내놓는 것을 바라는 것은 욕심일까? 무엇이 되었든 팩트와 진실, 대안은 '현장'에 있을 것이다. 그런 마음에서 다큐멘터리에서 이야기하는 ‘맹신’과 ‘광신’의 이야기를 거들어 본다.
광신(狂信)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1978년 남아메리카 가이아나에서는 약 900명이 독극물을 나눠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있었다. 종교단체 ‘인민사원’의 교주 짐 존스의 지시에 따른 일로 밝혀졌다. 살아생전 신자들은 ‘약속된 땅’에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며 가혹한 강제노동에 시달려왔다. 이런 강제노동은 불만과 의심을 만들었다. 불만이 쌓여 폐위될 위기에 몰리자 짐 존스는 신자들에게 ‘혁명적 자살’을 하자고 제안했다.
“우리가 평화로이 살 수 없다면, 평화 속에서 죽어 갑시다.
이 삶을 열흘 더 사는 것보다 죽음이 백만 배 낫습니다. 고통은 끝났습니다.”
-인민사원 교주 짐 존스-
종교, 사기, 음모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고 가족을 버리는 광신자의 실제 모습은 우리가 그리는 상상과 다르다. 생각보다 지적 수준이 높고 단호한 성격에 사회적으로도 제법 성공한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도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자신의 가장 아끼는 모든 것, 목숨을 포함한 모든 것을 내던지는 비이성적인 선택을 하고 마는 것일까? 우리는 흔히 ‘세뇌’를 이야기한다. 그곳에서 탈출하거나 뒤늦게 실체를 깨달은 사람들도 스스로 ‘세뇌’되었다 이야기한다. 그런데 말이다. 솔직히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그것은 세뇌가 아니다. 당신은 믿을 준비가 이미 돼 있었다.
우리는 ‘사이비’나 ‘이단’이라는 말로 그 교단과 교주에 모든 책임을 전가한다. 그러나 영어의 단어 ‘pseudo'는 ’유사‘하다는 의미가 있을 뿐 아주 부정적인 의미가 없다. 그저 따라 하거나 흉내 낸다는 의미가 강하다. 그래서 특별히 종교적인 유사 행위에 대해서는 ’컬트(Cult)'라는 말이 있다. 오컬트(Occult)라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이야기한다. 오컬트는 신비학(神秘學) 또는 은비학(隱秘學)이라고 이야기한다. 서양의 전통 사회에서 주술이나 유령 등 설화·문헌으로 전승되는 영적 현상에 대해 탐구하고, 그것에 원리나 규칙이 있다고 여기며 이를 이용하려 했던 신념을 말한다.
어휘는 라틴어 '오쿨로(óccŭlo)'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씨앗을 흙으로 덮는다', '숨기다'라는 의미의 동사다. 여기서 파생하여 '숨겨진', '비밀의'이라는 뜻의 '오쿨투스(occúltus)'라는 분사가 유럽 각국의 언어로 수입되어 '신비주의 학문'을 이르게 되었다. 본디 오컬트는 전근대 서양에서도 상류층만을 위한 학문이나 취미 정도로 취급되었으나,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 보급으로 인쇄 기술이 발달해 대중들도 쉽게 당시에 오컬트 상류층이 접했던 지식을 접할 수 있게 되어 널리 전파되었다. 이와 닿아 있는 컬트라는 단어에서 ‘컬티시’라는 형용 파생이 되어 ‘사이비에 사로잡히게 되는 마음’을 일컫는다.
<컬티시: 광신의 언어학>의 저자 어맨다 몬텔은 미국의 기자이자 작가이며 언어학자다. 그의 아버지는 어린 시절을 사회주의 코뮌(코뮌·공동체) ‘시나논’에서 보내다 그곳을 나와 신경과학자로 살았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몬텔은 그가 ‘컬티시’라고 부르는 ‘광신의 언어’가 가진 힘을 오랫동안 탐구할 수 있었다. 몬텔은 실제 사건을 취재하고 관계자를 인터뷰해 광신의 언어가 어떻게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현실을 만드는지를 자신의 책을 통해서 이야기한다.
자신의 책을 통해 몬텔은 ‘인민사원’ ‘헤븐스 게이트’ ‘3HO’ ‘사이언톨로지’ ‘샴발라’ ‘하나님의 자녀파’ 등 이른바 ‘사이비 종교’에서 시작해 다단계 마케팅 회사까지 퍼져 있는 컬티시를 찾아낸다. 그리고 이미 일상에 깊이 침투한 피트니스 클럽,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플루언서까지 살펴보며 그 안에 깃든 광신의 언어를 찾아낸다.
광신적 집단에 대해서 ‘세뇌당했다’고 규정하는 행위는 심리적 우월감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한다. 세뇌라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여 판단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간과한 것이고, 검증도 할 수 없는 그저 핑계와 구실의 가설이라고 비판한다. 누군가 ‘세뇌됐다’라고 말하는 순간 탐구와 진실의 규명을 위한 대화는 끝난다.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되었고 그런 행동을 했는지 밝혀낼 여지도 사라지고 만다. 더 중요한 질문을 사전에 차단하게 되는 말이 ‘세뇌’라는 것이다.
문제는,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는 ‘광신의 언어’
광신의 언어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자체의 위험성 보다, 한 번 빠지면 나올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 되기 때문이다. 사이비 종교와 유사 종교를 이용하여 타인의 믿음이라는 욕망을 갈취한 사람들은 모두가 언어 기술자들이다. 몬텔은 사이비 공동체가 내부자에게 의미와 목적, 소속감을 심어주고 확장하는 언어의 기술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보통 네 가지 개념으로 정리되는데, 이를 통해 한 사람이 컬트 공동체에 가입하고 파멸이 뻔히 예측되는 상황에서도 탈출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한다.
* ‘러브 바밍(Love-bombing)’:
상대에게 ‘나를 깊이 이해하고 인정한다’는 친밀감과 ‘나는 특별한 사람’이라는 우월감을 느끼게 하는 기술이다. 인민사원의 교주 짐 존스는 대화 상대의 인생에 맞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진보 성향 청년 앞에서는 사회주의자가, 노인 앞에서는 성경에 통달한 사람이 됐다. JMS의 정명석이나 만민교회의 이재갑은 이를 적절히 이용했다. 병자에게는 치유자가 되었고, 사랑을 잃은 사람에겐 위로자가 되었으며, 돈이 궁한 사람들에겐 금전 회복의 희망이 되었다.
이분법은 컬트 공동체의 가장 기본적인 기술이다. 아니 고대부터 종교의 기본적인 수단이기도 하다. 복음주의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선민사상’이 그 예다. 개신교의 교단들이 쉬운 번역서를 두고서 고루한 언어의 어려운 문어적 표현의 번역판 성경을 사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단과 정교의 차이는 백지장 하나 차이도 나지 않을 수 있다. 할리우드 배우 톰 크루즈로 유명해진 사이언톨로지의 창시자 라파예트 로널드 허버드는 신자만이 사용하는 신조어 사전까지 집필했다. 이런 내부자 언어는 기존 단어를 줄여서 만들거나, 기존 단어를 특정한 의미로 바꿔 사용하기도 한다. 공동체가 비밀스럽게 사용하는 내부자 언어는 내부자 스스로 우월하다는 엘리트 의식을 만들고 외부자를 멸시하게 한다. 내부자들은 외부 세계의 언어와 규범에 점차 마음을 닫아 버리고, 좁디좁은 자신들의 세상이 ‘보편적’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특정 단어를 듣기만 해도 공포, 슬픔, 분노, 환희, 존경 등의 감정을 촉발하는 방법이다. 이는 ‘이분법’을 언어로 표출하는 방법으로 ‘내부자 언어’로 대표된다. 내부자 언어는 시간이 지날수록 정서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지도자는 내부자 언어를 이용해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조종한다. ‘애어른(Old soul)’이란 단어는 ‘실제 나이보다 어른스러운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종교단체 3HO에서는 ‘수차례 환생해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을 뜻한다. ‘아가야’라고 부르는 아가동산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생각을 중단시키고 대화의 여지를 없애는 방법이다. 이는 로드된 언어와 짝을 이루는 심리적 지배 도구다. 컬트 공동체에 대한 내부자의 질문이나 비판을 사전에 차단해 버린다. ‘다 하나님의 계획이야.’, ‘생각이 너무 깊으면 불신이야.’. ‘교주에게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등의 표현들이다. 교단 밖의 세상에서도 권위를 통해 의사 개진을 막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흔히 자신에게 불리한 이야기를 ‘가짜 뉴스’라고 비난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 신이 배신한 사람들>에 나오는 사악한 교주들은 모두가 이런 이야기로 자신을 둘러싼 의혹을 잘라내 버린다.
광신의 언어는 종교의 교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앞서 이야기한 ‘다단계 피라미드 사기’의 경험이 있다면 쉽게 이해가 된다. 광신의 언어는 단지 교회나 절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상의 도처에 이 광신의 언어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이용하고 피해를 준다. 모든 사기의 행위가 그러하고 과장된 광고를 통한 비즈니스 마케팅도 마찬가지다. 특히 SNS에서의 주장과 논거는 자칫 컬트의 언어가 되기 십상이다.
특히 피트니스 클럽을 컬트 공동체로 보는 시각은 흥미롭다. 미국은 물론 한국도 21세기를 맞으면서 크로스핏, 필라테스, 사이클, 러닝, 요가, 폴 댄싱, 복싱, 주짓수 등 ‘피트니스 스튜디오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였다. 이를 몬텔이 분석하기에는 밀레니얼 세대, 즉 MZ세대 청년들이 점점 어려워지는 취업환경과 가중되는 사회보험 그리고 각종 차별 때문에 자신에게 직접 투자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분석했다. 특히 건강과 미용에 집중되었다고 보았다.
이런 피트니스 클럽은 또 다른 교회가 되었다. 피트니스 클럽은 회원들 사이 경쟁을 유도해 더 강하고 아름다운 몸을 갈망하게 했다. 각자의 운동 기록이나 신체 측정을 비교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보디 프로필’이라는 증거 사진을 남기기도 한다. 이를 위해서 각종 피트니스 트레이너와 인스트럭터의 도움은 필수가 되었다. 이 조력자들에게는 유사한 전형이 있다. 바로 ‘언어 사용 품새’다. 크로스핏 강사들은 군대 교관처럼 전투적인 말투와 구령을 붙이고, 필라테스나 헬스 강사들은 전형적인 추임새로 ‘하나만 더’를 외친다. 그에 빠져 자기 최면에 걸린 듯 회원들은 강도를 높여 가면서 운동에 빠져들게 된다.
피트니스는 이제 가장 강력하고 대세인 자기 계발이 되었다. 건강을 위해 근육을 늘리고 지방을 줄이자는 생각을 넘어섰다. 몸이 변하면 마음이 변하고, 마음이 변하면 삶이 변한다는 생각으로 종교가 되었다. 흔히 ‘운동 중독’이라는 현상이 발현된다. 회원들은 피트니스 클럽의 강사들이야말로 내 삶을 바꾸어줄 영적 스승처럼 느끼게 된다. 내 몸을 바꾸어 삶을 더 행복하게 살도록 해주는 존재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피트니스 클럽이 새로운 종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속에 컬티시 한 광신의 언어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광신의 언어에 빠지는 이유는 잘못이라기보다 모자람이다.
모든 종교와 구복의 전례를 거부하고 경계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리고 사이비와 유사 종교의 꾐에 넘어가 전 재산은 물론 자신의 중요한 본질까지 잃어버린 이들이 모두 ‘알면서 당한 사람’이라고 비판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처음부터는 아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이 광신의 언어가 얼마나 위험하고 본질 없는 것인지 말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 자신의 셈을 거듭하였을 것이다. 되돌아가는 것이 맞을지 지금까지의 시간과 비용을 생각해서 끝까지 가서 본전이라도 챙겨야 하는 것인지 말이다. 광신의 언어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은 도박판과 투기판이다. 그들은 그저 유희와 투자라고 우기지만 분명 확률 낮은 도박이고 투기임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JMS에는 ‘보고자’가 되고자 오랜 시간 그의 말도 안 되는 사기극을 동참한 사람들이 있었다. 집단 죽음이 발생한 오대양에서는 배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여전하다. 문제는 자본이라는 욕심 때문이다. 아가동산의 교주는 4년만 수감하고 56억의 벌금을 현금으로 지불하고 지금 어디선가 또 다른 사이비 행각을 벌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민중앙교회의 일부 신자들은 16년을 선고받아 수감하는 자신들의 ‘목자’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이들은 그저 ‘세뇌’ 당한 것일까?
우리는 어쩌면 외로운 사람들이라는 가사처럼, 사람의 존재가 본디 외로움을 타고났다고 생각한다. 무서운 자연에서 가장 약한 존재들은 집단을 이루어 생존을 도모하였다. 고대부터 생존을 위해 집단을 이루면서 사람은 이를 통해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무언가를 믿고 어딘가에 참여하는 일을 극도로 경계하고 거부한다고 세상이 올바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과도한 경계심은 오히려 삶의 가장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부분을 망쳐 놓거나 잃어버리게 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다. 스스로 논리를 세우고 판단의 감각을 잃지 않으면 우리는 광신의 언어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고립되고 단절된 집단 안에서든지 억압적이고 일방적인 스타트업 직장이든지 근거 없는 그래프로 주머니를 유혹하는 유튜브 구루 앞에서든지 논리적 사고와 감정의 직감을 굳게 세운다면 정신을 바짝 차릴 수 있다. 내 눈에 조상이 보이든지 영을 믿거나 천벌의 두려움이 있든지 중요한 것은 나의 논리와 그것을 직감적으로 판별할 기민한 용기다. 그것을 키울 수 있는 것은 끊임없는 독서와 사유, 그리고 건강한 사람들과의 치열한 대화가 도움을 준다.
인생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솔직한 표현으로 누구나 세상에 어떨결에 태어난다. 스스로 물어 보기를 나는 ‘남들이 말하는 나’인가 아니면 또 ‘다른 나’가 존재하는가? ‘남들이 말하는 나’가 나 자신이라면, 그 인간상은 내가 아니라, 그들이 나라는 인간을 통해 투영한 ‘그들의 나’다. 그러나 그것은 사이비다.
종교학자 배철현 교수의 묵상에 따르면 타인이라는 거울에 비친 나를, 진짜 나라고 착각하면 사이비 似而非가 된다고 한다. 사이비란 자신이 평생 일구어 완수해야 할 임무를 알지 못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인 척하는 거짓이라는 것이다.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인데, 내가 너인 척하거나, 혹은 내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그인 척하면, 그 인생은 이미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저 인생이란 무대에서 다른 사람의 역할을 대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사이비들은 자신을 응시하지 않는다. 아니 응시하지 못한다. 본질의 자신을 혐오한다. 존경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남들이 좋아할 법한 허상을 빌어 위장하고 스스로 확신한다.
그래서 인생의 모든 문제는 나를 비추어 보는 거울에서 출발한다. 거울이 비추어 보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은 자신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만들어 갈 것이다. 이처럼 굴곡지거나 청결하지 않은 거울에 비친 자신에 대한 것, 세상에 관한 정보는 그저 무식(無識)이 된다. 많이 알면 알수록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곧 다식이 무식이 되는 법이다. 무식은 자판을 열면 보이는 정보를 인지 못하는 상태가 아니라 자신과 세상에 대한 잘못되고 왜곡된 정보와 판단을 그대로 믿어 버리는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 세상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사이비는 바로 ‘무식한 가짜들’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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