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20년 차 가장 강재(박혁권)의 일상은 평범하지만 아쉬울 것은 없어 보인다. 직장은 그와 함께한 시간만큼 화려하지 않지만 안정적이다. 20년 동안 옆을 지킨 아내는 고분고분하지는 않지만 그를 가장으로 대우해 주고, 고3 딸은 큰 욕심 없이 In 서울을 목표로 수험생 생활을 잘 하는 것 같다. 이런 강재에게 사진은 오래된 취미이며 심심하기만 그의 일상에 작은 탈출구 같은 것이다. 아내의 배려로 강재는 제주로 나 홀로 사진 여행을 온다. 비가 오락 가락 하는 제주에서 강재는 바다의 모습, 해녀 등 제주의 풍광을 뷰파인더에 담는다. 그런 강재는 익숙하고 반복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숙소 콘도에 들어와서는 베란다 밖 주차장을 주시하고 관찰한다. 누가 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 같던 그는 별안간 카메라를 들고 주차장에 막 도착한 한 가족을 사진에 담는다. 그 사진들 속의 주인공은 10년 전 그와 밀회를 즐기던 옛 연인 시연(윤주)의 가족들이다. 그가 제주에 나 홀로 여행을 온 것, 그리고 숙소에서 옛 연인을 조우한 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그의 의도된 발걸음이었을까.
배우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조재현의 감독 첫 작품 <나홀로 휴가>는 작지만 단단한 작품이었다. 영화는 일상을 담담히 표현하면서도 나름 대단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대부분 일상성을 유지하는 작품에서 사건은 없어도 되는 그러한 것인데, 조재현 감독의 영화에서의 일상은 ‘남다른’ 사건을 등장시키면서 그 일상의 다른 면을 비추어 준다. 하루하루가 별반 차이가 없는 날들의 연속이고, 그 하루하루의 일들을 그놈이 그놈 같이 엮어 놓은 굴비두름 같은 것이 일상이다. 그래서 ‘대단한 사건’은 일상에서 존재할 수 없는 일일 것만 같다. 그러나, 그 대단하고 남다른 사건이 남들은 모르지만 나의 하루하루에 늘 존재하고 있다면, 그것을 일상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일까?
일상, 평범과 일탈의 아슬아슬한 동거
전형을 넘어서 모범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중년 가장 강재의 일상은 남다를 것 없어 보인다. 회사의 일은 익숙한 만큼 걱정거리도 줄어들었다. 수험생 딸도 큰 속 썩임 없이 생활하고, 20년 동안 살아온 아내도 속으로나 겉으로나 그를 존중하고 대우한다. 오래된 친구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서로의 나름 나름의 사건과 고만 고만한 행복을 나눈다. 특별한 일이라는 것은 친한 친구의 모친상 같은 경조사이고, 친구 녀석이 자전거를 잃어버려 차비를 꾸러 사무실로 찾아오는 그런 정도의 일들 뿐이다. 그런 평범하고 모범적인 가장에게 비밀이 있다면, 그 비밀이 꽤 오래된 것이고 어쩌면 늘 그의 일상에 녹아 있다면 이것은 아주 특별한 사건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남다른 사건임에 틀림없지만 그의 매일 같은 일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매우 모순적인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이런 모순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남들의 눈에 보이는 나의 평범한 일상과 나만이 아는 아주 유별난 사건들이 동전의 양면처럼 등을 맞대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 결국 삶이라는 것의 총체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평범한 가장 강재에게는 사랑했던 옛 연인이 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첫사랑, 옛사랑 없는 것이 더 이상하다 할 수 있지만, 강재의 그 옛 연인은 10년 전에 요가 수업을 들으며 만났던 요가 강사였다. 다시 집고 가자면, 그가 결혼 생활을 10년 정도 보내고 있을 때 만난 소위 말하는 불륜의 상대였던 것이다. 중년의 남자에게 결혼 생활에 있어서 위태의 순간이 없겠냐되 물을 수도 있는 일이다. 대부분 잠깐의 일탈로 ‘바람’이라는 사건으로 점처럼 남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위태로움이 결혼생활의 매듭을 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 또한 요즘 세상에서 아주 드물고 유별난 사건은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강재에게 유별난 면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옛 연인의 주변을 서성이며 그녀의 삶을 직간접적으로 엿보는 것이다. 그의 관음적인 엿보기는 근래에 갑자기 생긴 호기심은 아니다. 10년 전 어느 날 불현듯 자신을 떠나 결혼을 한 그 순간부터 강재는 시연의 뒤를 쫓아가고 그녀의 삶을 엿듣고 엿본다. 강재의 엿보기는 매우 비정상적이다. 심지어 그녀의 신혼여행에는 옆방에 들어가 그녀의 공식적인 첫날밤을 몰래 엿들으며 자위를 한다. 시간이 흘러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강재는 매주 같은 날 그녀의 요가학원이 보이는 기원에 자리를 잡고 그녀를 살핀다. 이미 그녀의 SNS에 들어가 사진을 수집한 것은 예삿일이 되어 버린 정도이다. 그의 사진 촬영을 빌미로 한 ‘나홀로 여행’은 다름이 아닌 옛 연인 시연의 여행을 따라다니는 스토킹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강재의 일상은 평범한 외면과 매우 비정상적인 내면의 세계가 맞대어 있다. 그 묘한 균형으로 강재는 겉으로 완벽한 중년 가장이 되어 있는 것이다.
사랑인가 집착인가, 관음과 스토킹
일반적이고 객관적인 관찰자로 이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관음증 심한 스토커 똘아이의 병적 일상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의 일’로서 관찰하고 사회적인 합의의 통념에서 비롯된 판단일 뿐이다. 강재는 어쩌면 자신의 사랑을 그리고 시연과의 관계를 아직 마무리 짓거나 정리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강재의 사랑의 시작도 사실 몰래 엿보기의 시작이었다. 자신이 떳떳하지 못한 입장이기에 맘에 들어 오는 여인을 그저 엿볼 수 밖에 없었다. 그 엿보던 짝사랑이 서로의 애틋한 사랑으로 이어진다. 물론 유부남의 아슬아슬한 사랑을 매듭짓기 위해서는 강재의 강단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진짜 시연을 사랑했다면 자신의 결혼을 정리하고 시연을 선택해야 했을 것이고, 반대로 가정이 중요하였다면 시연이 불현듯 떠나기 전에 자신이 그만두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를 비호하고 두둔할 생각은 없지만, 강재는 그 선택을 쉽게 할 수 없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아직 그 선택을 위한 시간과 준비가 더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시연과 시간을 내어 함께 떠난 제주 여행길에서 그는 제휴카드 할인에 목을 매면서도, 그녀가 원하는 오픈 쿠페를 렌트하여 로맨스 영화 같은 장면도 연출한다. 아직 현실과 낭만의 경계에서 이리로 저리로 흔들리며 아직 어디로 갈지 정리할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중에 시연이 일방적으로 떠나갔다. 이미 결혼 상대를 만들어 결혼 계획을 하고 ‘정리’나 ‘마무리’없이 강재를 떠나간 것이다. 시연의 입장에서는 이별했고 헤어졌겠지만, 강재는 아직 이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을 것이다. 아직 헤어지는 중일지, 아니면 자신의 사랑이 잠시 휴지기를 갖는 것일지 도무지 판단할 수 없기에 그녀의 주변을 맴돌고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강재의 입장서는 정리되고 마무리된 것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재는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위태롭고 기묘한 균형으로 일상을 지탱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달, 사건은 바로 이런 균형이 무너졌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매주 같은 요일 찾아 간 기원에서 내다보는 그녀의 학원은 블라인드를 깊게 내리고 닫혀 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던 그녀의 일상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닌가 걱정도 되고 남모를 기대감도 들어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집으로 발길을 옮긴다. 며칠 집을 비웠는지 현관 대문에 붙은 전단지와 메모로 어림짐작을 해보다, 결국 문고리를 돌려 본다. 급하게 집을 나섰는지 문도 걸어 잠그지 않았다. 강재는 짧은 고민 끝에 그녀의 집으로 들어선다. 그녀의 일상의 자취를 보면서 10년 전 그녀와 함께 보내었던 일들을 떠 올려 낸다. 그러다 그녀의 가족이 집으로 돌아오고, 강재는 어쩔 수 없이 스스로 자신을 시연의 장롱에 감금해 버린다. 진짜 ‘사고’가 터진 것이다. 아슬아슬한 그의 일상의 균형이 깨져 버린 것이다.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지고만 것이다. 이것이 강재의 비정상적인 내면의 관음과 스토킹의 마무리가 되는 사건이 되는지도 모른다. 비로소 시연의 장롱 속에서 마지막 ‘나홀로 휴가’를 보내면서 그녀와의 사랑을 ‘정리’하고 ‘마무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친한 친구 영찬은 결혼을 네 번이나 하고 전처와는 친구처럼 지내는 것은, 어쩌면 강재와 달리 마무리하고 정리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 코미디 같은 사건은 결국 매우 슬픈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사랑을 시작하는 것보다 마무리 짓는 것은 매우 중요하면서도 아프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이별'은 노랫말일 뿐일까?
영화는 개봉과 함께 논란과 비판을 낳았다. 여성을 무시하는 영화라는 평부터 사회적으로 위험한 범죄가 되는 일을 로맨스처럼 그려냈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조재현 감독도 인정하였듯이 그 균형을 맞추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소설이든 영화든, 아니면 노래든 그림이든 세상의 일반적인 가치관을 모두 담아 스스로 판단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 된다면 세상의 모든 이야기와 예술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강재의 일탈이 관음이나 스토킹이라는 병적 행위, 매우 비정상적인 관념의 발로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강재’일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모두’라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사랑하고 헤어지는 일에서 마무리 짓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세상의 잣대가 허락하지 않은 사랑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시작하고 한창일 때는 어느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지만, 식어버리고 마무리되어 가는 내리막 길에서는 남들의 시선이 불편해 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시선에 먼저 지쳐 버린 사람이 성급하게 혼자만의 정리와 마무리를 하게 된다. 남들 같은 보편적인 삶을 만들어 그 속으로 숨고만 싶어 지면, 지난날의 부적절한 관계는 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서둘러 관계를 차단하고 흔적을 지운다. 일방적으로 중단한 상대가 차단하고 숨어 버릴수록 남겨진 사람은 불안하기 마련이다. 아직 나는 끝내지 않았는데 상대는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녀를 찾아 나서고 그녀의 흔적을 어렵게 어렵게 뒤쫓아간다. 그저 마무리하고 정리하기 위해 주변을 서성거리고 삶을 엿보았는지도 모른다. 친구를 통해 이별의 이유를 전하는 시연은 강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시연이는 강재 씨에게 잊힐 까 봐 두려웠데요.”
자신이 잊힐까 봐 상대를 먼저 지운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 모순된 말에 대한 변명이든 설명이든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그제야 마무리될 것이니까 말이다. 사랑은 시작보다 끝이 어렵다. 사랑뿐이겠는가 사람과 관계를 맺고사는 삶이라는 것이 다 그러할 것이다. 나도 아직 마무리하지 못해 질척이며 미련 뿌리는 ‘그 사랑’을 이제 마무리하기로 한다. 참 ‘강재’와 많이 닮아 있었다. 내가 사는 삶이 내가 했던 사랑이 말이다. 어디 나뿐이겠는가. 가을이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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