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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읽기

[영화리뷰: 이퀄스 (Equals, 2015)] 사랑은 늘 옳다

by 박 스테72 2020. 2. 8.

인류에게 커다란 사건이 일어나고 생존한 자들은 그들만의 엄격한 사회를 형성한다. 바로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 ‘선진국’이라는 세계를 만들어 감정으로 인한 불필요한 위험요소가 발생하지 않도록 엄격히 통제하는 그런 사회를 만든다. 이 ‘선진국’에서 최고의 직장인 프로덕션 ‘ATMOS’에 근무하는 일러스트레이터 사일러스(니콜라스 홀트)는 어느 날 신체와 감정의 변화를 느끼고 클리닉에서 ‘SOS (Switched-On-Syndrome: 감정 통제 오류 증상)’ 1기의 확진을 받는다. 감정이 철저하게 통제된 구역에서 감정 통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사회로 부터의 도태이고 곧 사멸을 예고하는 일이기에 사일러스는 하루하루를 완전한 치료제가 나오기만을 기대하며 보내게 된다. 그러던 중에 직장동료 니아(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주변에 일어 나는 현상과 일들에 대해 미묘한 반응을 눈치채곤, 곧 그녀가‘숨은 감염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니아를 관찰하던 사일러스는 곧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녀와 ‘사랑’이라는 감정에 잡혀 ‘감정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미지의 세계 ‘반도국’으로의 탈출을 계획하게 된다. 그들은 탈출에 성공하게 될까? 성공의 여부를 떠나 그들은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을까?

 

 

이 시대의 서사의 주류 ‘디스토피아’

영화 <이퀄스>는 이야기 자체가 어렵지는 않다. 줄거리도 복잡하지 않다. 하지만, 영화를 접하기 전에 장르적 관심은 동반되어야 영화가 전해 주는 부분 부분의 메시지를 조합하여 큰 틀의 그림이 가능하다. 그것은 바로 ‘디스토피아 장르’에 대한 이야기이다. 굳이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디스토피아’란 ‘유토피아’라는 현실에 없는 이상적인 세계의 반대 개념이다. 유토피아와 대비되는, 전체주의적인 정부에 의해 억압받고 통제받는 가상사회를 말한다. 컴퓨터 기술의 발달로 감시가 더욱 공고화되는 사회, 극단적인 환경오염으로 생태계가 파괴된 사회, 기계에 의해 지배당하는 사회, 핵전쟁이나 환경재해로 인해 모든 인류가 멸망하는 사회 등이 디스토피아에 해당된다. 문학, 영화를 비롯한 예술 전반적인 주요한 주제로 작용하여 일종의 장르로 자리 잡은 것인 ‘디스토피아’ 장르일 것이다. 

 

디스토피아 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조지 오웰의 <1984>, 그리고 예브게니 자이마친의 <우리들> 같은 작품을 들 수 있고, 이미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고 그 주제의 변용으로 다른 문학이나 예술 장르에 많은 영향을 끼친 작품들이다. 영화 <이퀄스>도 이러한 디스토피아 문학의 맥락을 이어받아 아포칼립스 이후의 암울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내용이나 소재의 구성, 사회를 이야기하는 묘사에 있어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밀접하게 맞닿아있고, 풀어내는 이야기 품세는 다르지만 <이퀄 브리엄>, <인타임>, <엘리시움>, <네버 렛 미 고>, <가타카> 같은 영화들이 쉽게 떠올려지는 이유도 이런 장르적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조금 더 확장하자면 현재 나오는 많은 판타지 문학들이나 고전 마블을 영화화 한 블록버스터들도 이러한 ‘디스토피아’의 DNA를 내재했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 인류나 사회의 거대 사건 이후에 세계 질서가 재편되고, 그 안에 항거할 수 없는 계급과 권력이 형성되며 민중은 그저 그 사회적 규칙과 태생적인 신분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멀지만 가까운 미래를 이야기하는 작품들이 대부분 그러하다. <헝거게임>, <다이버전스>, <메이즈 러너> 같은 최신의 판타지 시리즈들이 그러하고, <터미네이터>, <엑스맨>, <혹성탈출> 등의 긴 세월을 두고 스핀오프 되고 프리퀄로 제작되는 연재도 마찬가지이다. 조금 더 확장하자면 내 나이만큼 오래된 <스타워즈> 시리즈 같은 ‘스페이스 SF’는 물론 최근 주요 블록버스터 장으로 자리 잡은 ‘좀비물’에도‘디스토피아’의 세계관은 깊숙하게 침투해 있다. 어쩌면 세계관을 관통해야만 하는 작품에는 ‘디스토피아’는 늘 작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왜 지금 우리에게 미래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로 다가오는 것일까?

 

 

‘감정’이라는 질병, 그중 가장 독한 ‘사랑’이라는 오류

영화 <이퀄스>에서 보여 주는 미래의 어느 사회는, 영화에서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사람들의 탐욕으로 세상에 큰 전쟁이 일어나고 극히 소수만 살아남았다고 서술한다. 그 대사건 이후에 새로 구성된 사회는 대도시의 뒷골목처럼 암울하거나 어둡지는 않다. 오히려 영화에 등장하는 건물이나 거리는 모두 깨끗하고 불필요함 없는 구성으로 미니멀리즘의 극치를 보여 주는 듯 잡티 하나 없다. 등장하는 사람들의 복장도 근무하는 일에 따라 흰색이나 무채색에 가까운 단색의 복장으로 깔끔하기 그지없다. 개인이 생활하는 주거의 공간도 기본적인 생활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최대한 제거된 것처럼 간소하고 정결하다. 보이는 공간과 외부의 의, 식, 주와 관련된 것들 것 그러한 것이 아니다. 이 티끌 하나 없는 정결한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 모두의 마음속도 깨끗하게 치워져 있는 것이다. 감정이 철저하게 통제된 사회 ‘선진국’에서 ‘감정’이란 감기, 홍역, 수두, 암 같은 질병일 뿐이다. 감정이 사회에 순작용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그 감정은 결국 ‘욕구’로 이어지는 연장선이기에 사회의 파멸에 이용되는 질병에 지나지 않는다는 관념이 이 사회를 유지하는 근본적인 규율인 것이다. 어떤 계층이 누가 무엇을 위해 만들어 낸 사회적 규범 일지는 모르지만, 그 사회를 표면적으로 바라보기에는 합당해 보인다. 사회는 늘 정결하고 효율적이며 위험 요소가 최소화되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없을 것 같이 사회의 규범에 잘 따라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사일러스에게 ‘감정’이 스며든 것은 그 사회에서는 개인적 재앙일 뿐이다. 그곳의 사람들은 ‘감정’을 느끼는 것을 ‘오류(버그)’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하자면 감정을 느끼는 존재는 도태되고 열등한 낙오자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사일러스를 보는 타인들이 걱정하는 것은 자신에게 혹 전염이나 오염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뿐인 것이다. 그러한 감정들 중 가장 격하게 작용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이다. 사일러스도 의사와 당국의 권유대로 약을 복용하여 ‘감정 통제 오류’의 증상을 억제하고, 곧 출시된다는 완전한 치료제를 기대하며 힘든 하루를 견디어 낸다. 하지만, ‘숨은 감염자’ 니아를 만나고,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면서 삶의 목표와 계획은 바뀌고 만다. 강력한 통제와 적발 시 수용소 수감이라는 강력한 위험에도 그들의 사랑은 멈추기 힘들다. 사랑이라는 강력한 감정에 빠진 그들에게 가장 큰 걱정은 이 감정을 느끼지 못할 위협일 뿐, 사회의 규범이나 이 사회에서의 안전한 생활은 더 이상 불필요하다. 그저사일러스에게는 니아가 니아에게는 사일러스가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뿐이다. 하지만, 이 엄격하게 통제된 사회에서는 그들의 사랑은 위험한 존재의 항거이고 의미 없는 반항일 뿐이다. ‘사랑’ 하나로 세상과 맞서기란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나 행복한 나라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 제시하는 이상향 국가의 조건은 두 가지이다. 바로 ‘평등’과 ‘쾌락’이다. 단어적으로 대치되지도 않고, 언뜻 이해하기 힘든 것이지만, 이 ‘쾌락’이라는 것을 현대사회의 개념 ‘풍요’로 바꾸면 이해가 가능하다. 평등한 조건이 없으면 진정한 즐거움은 있을 수 없고, 일상에 낙이 없으면 평등을 이루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모어는 한 사회의 재화의 총화는 일정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각자의 탐욕과 이기심만을 추구한다면 부의 편재와 빈부의 격차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그러므로 근대적 생산기술이 도입되지 않은 사회, 다시 말하면 노동력과 생산량에 일정한 한계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 자기만족을 얻을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인간의 욕구와 수요를 억제하고 생산과 분배를 통제하는 것이다.

 

현대 국가들은 이 개념으로 저마다 이상적인 국가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낸다. ‘평등’을 강조하는 ‘공산주의, 사회주의’가 그러하고, ‘풍요’를중점으로 두는 ‘자본주의, 자유주의’ 국가관이 그러하다. 이러한 기본적인 이상향에 대한 조건을 기형적으로 변형한 것이 바로 ‘전체주의-파시즘’이라고 할 수 있다. ‘평등’이라는 조건을 타고난 것으로 규정하고 ‘풍요와 쾌락’에 대한 것도 그 타고난 계층에 따른 차별적 수행이라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제시한다. 결국 극 소수의 지배세력이 다수의 사람들에게 계급과 계층을 부여하고, 개인의 의사보다 전체의 효율과 이익을 대변하는 그런 사회로의 변형이 인류 역사에 큰 사건들을 만들어 내었다. 이러한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 사회의 대변혁을 꿈꾸게 되고, 그 혁명 같은 변화 이후의 새로 다가올 ‘이상향’을 그리게 된다. 하지만, 암울한 지금의 상황에서 그리고 지난 역사의 수레바퀴 안의 교훈에서 보면 ‘어디에도 없는 나라 (U-Topia)’는 현실에서 다가오지 않고, 다시 전체주의와 기형적인 통제의 사회가 다가올 것만 같은 두려움만 엄습해 온다. 그 까닭은 지금 사는 우리의 일상이 우리의 세계가 그리고 우리의 삶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모습으로 투영한 내일의 세상은 누구나 행복할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누구나 행복하지 않다면, 모두가 행복과 쾌락과 욕구를 느끼지 않는 그런 감정의 통제가 더 마뜩해 보인다. 이 답답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랑하고 아파하고 그리워하며 동정하는 감정 따위는 감기보다 못한 ‘병증’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사랑에 빠져 본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한다. ‘눈이 멀었고, 두려울 게 없었다.’고 이야기하며 그 감정의 소용돌이에 대한 위험을 경고한다. 마치 사랑하면 현실적이지 못하고 합리적인 사고가 불가능하며 극단적으로 개인주의로 돌아간다고 경고한다. 그 이유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실로 위험하고 불편한 감정 이어서일까?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이 평등하지도 않으며 풍요롭지도 않기 때문일 것이다. 불평등하고 빈곤한 삶에 있어서 ‘사랑’따위는 거추장스럽거나 현실적 인문제 해결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부스러기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가진 것 없고 배경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제 사랑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어렵게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단둘이 보내는 시간에서는 마치 이 사랑으로 세상을 바꿀 혁명을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내 세상 속으로 돌아오고, 감정이란 없어진 사람들의 틈 속에 있다 보면, 중증 질병에 걸린 환 자이거나 비정상적인 존재처럼 느껴질뿐이다. 세상에서 정의한 풍요와 평등을 스스로 쟁취할 수 없기에 사랑을 포기하게 된다. 사랑을 포기하더라도 그 사랑하는 마음과 이별의 아픔은 마음에 남게 되는 것이 가장 두려워진다. 그 때면 주사 한방, 약 한 알에 모든 것을 깨끗이 리셋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망상마저 스며들게 된다. 이 삭막한 세상은 ‘사랑’하기에 너무나도 힘들기 때문이다.

 

 

영화 <이퀄스>는단번에 보기에 조금 어려운 영화일 수 있다. ‘디스토피아’에 대한 이야기가 그러하고 감정이 통제된 사회를 보여주면서 소중한 ‘감정’ 을 조금씩 조금씩 보여 주기에 그러하다. 더욱이 영화의 마무리가 애매해 보이기에 쉽게 다가 오지는 않는다. 이야기의 전개가 어렵다기보다 영화의 속살에 새겨진 깊은 의미를 꺼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자신의 삶을 깊숙이 조망하기 어려운 세상을 살고 있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우리도 이미 ‘감정 통제’된 사회에서 무언가를 느끼기엔 감정의 단초들이 거세된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디스토피아’와 ‘아포칼립스’ 그리고 ‘사랑’에 대해 한 자락이라도 생각을 거둘 수 있다면 이영화를 보는 이유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사일러스와 니아의 안타까운 엇갈리는 사랑의 행보를 보면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클리셰도 잠시 떠 올릴 수 있었고, 감정을 거세당한 니콜라스 홀트의 연기를 보면서 <웜 바디스> 속의 감정을 느끼는 좀비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는 상호 콘텍스트도 의미가 있었다. 무엇보다 그간의 많은 일들이 얼굴에 내려앉아 다크서클에 잡티 가득한 얼굴에 떡진 머리로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연기하는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는 앞으로를 기대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요즘 영화를 보면서 모든 영화를 ‘사랑’ 타령으로 이어 붙이는 나 자신의 마음속에도 정당성을 가져다주는 작품으로 남겨 두기로 했다. 그리고 이 참에 알게 된 감독 ‘드레이크 도리머스’의 사랑에 대한 물음을 던져주는 3부작이라는 이전 영화 <우리가 사랑한 시간(2013)>, <라이크 크레이지(2011)>도 조만간 찾아 보리라 생각해 주는 그런 영화였다. 

 

어찌 되었든 내게는 아직 사랑은 늘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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