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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읽기

[영화리뷰: 터널 (Tunnel, 2016)] 이 세상의 흔하디 흔한 재난, 그 중 가장 큰 재난은 ‘고립’

by 박 스테72 2020. 2. 8.

붕괴된 터널에 갇힌 자동차 영업사원 정수(하정우)는 얼마 남지 않은 핸드폰 배터리가 다하기 전에 구조대가 올 것이라 희망한다. 터널에 들어 서기 전에 들른 주유소에 받은 생수 두 병은 이미 다 마신 지 오래이고, 소변을 받아 마시라는 구조대장 대경(오달수)의 충고를 실행에 옮길 판이다. 함께 생존자로 의지하였던 미나(남지현)는 큰 부상을 입고 이내 숨을 거둔다. 이제 붕괴된 터널의 이 좁은 공간 안에는 미나가 남긴 강아지 댕이와 정수뿐이다. 일주일이면 구출된다는 기약은 보름이 넘도록 진행되고, 그 구출 계획마저 공사비리로 인한 설계변경으로 헛고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 정수는 이내 이성을 잃고 분개하고 동요한다. 이제 핸드폰의 배터리도 다해 가고, 바깥세상에서의 소식은 유일하게 잡히는 클래식 라디오 채널뿐인데, 정수는 희망대로 기적 같은 생환을 할 수 있을까?

"나... 살아 있는데..."

영화 <터널>은 이야기를 줄거리 잡자면 너무 간단하다. 강원도 국도에 개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널이 무너졌고, 그 안에 사람이 갇히게 되었다. 이 생존자를 구출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일들이 드러나고 발생한다는 그런 이야기다. 그러나 줄거리 요약만큼 상황은 간단치 않다. 우선 터널의 붕괴의 원인에 대한 진실이 드러난다. 한국에서 FM(Field Manual)대로 하는 공사가 어디 있느냐는 조소적인 인터뷰가 대변하듯 대규모 토목사업에 비리의 구멍은 늘 존재하고 있다. 그뿐인가 붕괴 직후 어렵사리 닿은 전화 너머의 상황실 담당자는 상황의 급박성을 파악하지 못한 채 그저 통상적인 이야기로 대답한다. 도착한 구조대는 붕괴에 대비한 매뉴얼을 최신으로 구비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의 관료들은 한 사람 국민의 생명을 위해 최고의 전문가를 동원해 최선을 다하겠다면서 익숙한 누리끼리한 점퍼를 입고 기념 촬영하기 바쁘다. 그뿐인가. 언론기자의 관심사는 뉴스거리를 위한 무모한 통화를 시도하거나 그저 기사거리를 위해 ‘기록’에 아쉬워하는 것을 감추지 않는다.

익숙한 이야기다. 우리는 현실과도 너무나도 유사한 이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받아들인다. 영화 <터널>을 보고 2년 전 차가운 바닷속에 묻힌 어린 희생자들의 ‘세월호’를 떠올리고 입에 올린다. 말하기에 어렵지 않다. 이제는 그 바닷속에 묻힌 어린 학생들의 마음보다는 그 사건을 만든 이 세상의 부조리에 조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 말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영화를 보는 중에 유모 코드를 부러 넣어 유도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붕괴된 터널 안 좁은 차 안에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정수의 모습에 관객들은 알찬 웃음을 보낸다. 개인적으로 매우 불편하였다. 극과 극은 맞닿아 있다고 하지만, 비극과 희극이 이처럼 맞닿아 있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매우 불편하다. 관조하고 관찰하는 입장에서 터널의 붕괴나 그 원인이나 구조과정의 부조리는 코미디와 같을 것이다. 웃음만 나오고 웃기지도 않다는 생각이 가득 찰 것이다. 왜냐하면 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영화 <터널>을 이야기하면서 ‘세월호’를 떠 올리다는 생각이 많이 부끄럽다.

“사람들은 통계보다 희망을 믿고 싶어 합니다.”

영화 <터널>은 극한 상황에 고립된 인간의 여러 면을 이야기하는 ‘재난극’이다. 보통 재난극은 대규모 천재지변이나 전쟁 같은 블록버스터 급의 재난영화도 있지만, 개인의 외부로 부터의 철저한 고립을 그린 재난극도 여럿 있었다. 좁은 공간에 갇힌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은 영화 <베리드, 2010>을 떠올리게 한다. 뜻하지 않은 사고에서 본인만의 의지로 결정하고 스스로의 살길을 찾아내는 <127시간, 2010>도 생각나게 하고, 어느 누구 의지할 곳이 없어 배구공 ‘윌슨’을 친구처럼 여기며 버티던 물류회사 직원의 생존기 <캐스트 어웨이, 2000>도 그리게 한다. 그리고 터널 안에서의 구조와 생존을 그렸던 실버스터 스탤론 주연의 <데이 라잇, 1996> 도스 쳐 지나가게 한다. 이처럼 외부와의 고립은 말 그대로 ‘재난’이고 ‘재앙’이기 때문에 그 사건의 해결과 극복은 늘 극적으로 구성되고 다가오게 된다. 그런 ‘재난’의 중심에는 바로 외부와의 철저한 ‘고립’이다.

‘고립’이라는 말은 타인과 분리되어 멀어진 상태를 이야기한다. 고립의 원인이야 여러 가지로 설명되지만 근본적인 상황은 크게 두 가지로 설명된다. 나의 의지로 스스로를 은둔시켜 세상과 분리하거나 반대로 남들이 따돌리거나 분리시켜 홀로 남겨진 외톨이가 되는 그것이다. 전자의 상황이야 스스로 만들어 낸 상황이라 개인에게 재난으로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후자의 상황이라면 실제로 그 기저의 감정이 몹시 소용돌이치며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게 된다. 그것도 예상치도 못하고 뜻하지도 않은 갑작스러운 재앙에 가까운 사고에 의한 고립이라면 공포 그 이상일 것이다. 밤길을 걷다가 만나면 가장 무서운 존재가 사람이라지만, 거꾸로 사람 하나 곁에 없다고 느끼는 고립과 고독감이야 말로 스스로 이겨내기 힘든 무서운 공포가 된다. 영화 <터널>은 그 고립에 처한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천성이 낙천적이라 상황을 이겨내는 정수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보이나, 그것은 살아 남기 위한 고립에서 벗어나 세상과 다시 조우하고자 하는 처연한 몸부림이다. 내가 저 안에 있고 정수와 같은 상황이라면을 가정한다면 절대로 그의 우왕좌왕하고 갈등을 직접 내뱉는 모습에 웃음을 던질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 상황에서 눈물이 나고 가슴이 아파왔다.

개인의 경험이야 여러 가지이겠지만, 세상과 고립된다는 것만큼 이겨내기 힘든 상황도 드물 것이다. 아무런 희망이 안 보여도 좌절이 깊겠지만, 무언가 바라고 바라다 그것이 종국에 틀어지거나 기약 없이 지연되었을 때의 낙심은 겪어 보지 않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약속된 시간만 보내면 다시 세상으로 나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손수 만지고 그들의 눈을 쳐다보며 하루를 보낼 것이라 희망하며 고된 현재를 인내한다. 하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 약속의 기한이 늘어지고 변경된다. 이제 그마저도 믿을 수 없고 나는 세상과 단절된 채 이곳에 이렇게 고립된다고 느끼는 순간 더 이상 삶을 이어가는 의미를 찾기 어려워진다. 이것이 가장 힘들고 아픈 고립된 사람의 고통일 것이다. 누군가의 비리와 부조리로 인한 지금의 상황의 원인이나, 이 사태를 해결하는 사람들의 무책임하고 어이없는 행태에 대해서 분노를 느낄 새도 없다. 그저 이 답답한 단절에서 세상과 고립에서 나를 꺼내 주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그러다 그것이 부질없는 희망고문임을 깨닫는 순간 가장 큰 고통으로 아파하게 된다. 그것이 갇히고 묻힌 사람들의 가장 큰 고통일 것이다.

“사람이 갇혀 있다고요.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말도 안 되는 재앙 같은 사고들은 여러 번 있었다. 최근의‘세월호’가 그러할 것이고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삼풍백화점’ 사고도 그러하다. 삼풍 사고로 가장 사랑하던 대학 동기를 잃었다. 모스크바로 교환학생을 떠나기 전날 짐을 추리기 위해 모친과 백화점을 방문한 그 친구는 살아서 백화점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가슴이 아팠던 것은 기시찔린 작은 아픔에도 아파했던 그녀가 이 사고로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웠을 것이며, 조금의 외로움도 견디기 힘들어 MT 때 쪽잠을 잘 때면 늘 품을 파고 들어와 안겨 자던 친구였기에 얼마나 외로웠을까를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아리도록 아파 왔었다. 아마 저 차가운 바닷속에 묻힌 어린 학생들을 사랑하던 가족들은 이 사고의 원인에 대한 분노 이전에 사랑하던 자녀, 형제, 친구들의 고립감으로 인한 공포를 그리면서 가슴 아파했을 것이다. 세상의 부조리나 비리, 그리고 전혀 개선되지 않은 많은 것을에 대한 조소와 손가락질 그리고 비판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세상과 시대와의 호흡을 너무나도 강조한 나머지 좁은 공간에 갇혀 고립감으로 아파한 이들의 진짜 고통이 묻혀서는 안 될 일이다.

세상과의 고립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 채 많은 곳에서 일어난다. 물리적인 사고로 인한 것일 수도 있고, 사회 경제적인 도태에서 비롯된 따돌림일 수도 있다.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재난은 아마도 ‘고립’이고 ‘고독’ 일 것이다. 영화 <터널>은 그런 의미에서 아쉬운 영화이다. 관객의 호응을 무시할 만큼 자유로운 제작자와 감독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세상의 이야기와 시대의 이야기를 포장하여 영화를 딜리버리하는 것은 다반사가 되었다. 이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이야기를 개인의 고립된 공포와 연결지었다. 그러다 보니 중심이 모호하다. 이도 저도 아닌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부산행>의 연상호 감독이 <서울역>이라는 애니메이션 프리퀄으로 그 저울의 균형을 절묘하게 맞춘 것 처럼 김성훈 감독도 <터널>에서 하지 못한 진짜 이야기를 다음에 하기를 바래 본다. 김감독의 지난 작 <끝까지 간다>의 표제 처럼 가능하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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