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경무국 소속 경부 이정출(송강호)에게 특명이 하달된다. 의열단의 핵심 멤버 김우진(공유)에게 접근하여 의열단 단장 정채산(이병헌)의 동선을 파악하라는 것이다. 정출과 우진은 서로의 정체를 알면서도 속내를 감추고 작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한다. 의열단은 거사를 위해 경성으로 폭탄을 유입해야 하고 경무국은 그런 의열단을 모두 색출하고자 하는 의도로 서로가 서로를 속이며 이내 상해로 모이게 된다. 잡으려는 사람과 잡히는 사람이 뒤섞이고, 서로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회유하기도 하고 속이기도 하는 그런 일들이 복잡하게 엉키게 된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의열단은 폭탄을 나누어 담고 경성으로 가는 기차에 오르게 되고, 정출도 경무국 비밀 순사들과 함께 열차에 오른다. 누가 누구를 속이는 것이고 적은 누구이고 내 편은 누구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열차는 경성에 다다르는데. 결국 누가 목적을 이루게 될까. 그리고 진짜 밀정은 누구였을까.
일제 강점기에 대한 이야기들이 영화로 제법 많이 만들어졌다. 최근 <덕혜옹주>나 <암살> 같은 역사적 사실에 상상을 더해 허구적 이야기를 만든 팩션 물이 대표적이고, <청연>이나 <YMCA 야구단>처럼 역사와 사회에 대한 직접적 서술보다는 그 시대에 있었던 특징적 사건을 묘사하면서 역사와 사회를 비추는 영화도 있었다. 큰 수레바퀴 같은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주권을 잃은 민족과 나라에 대한 이야기는 매력적이고 그 파생력도 대단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추석 무렵 개봉한 김지운 감독의 영화 <밀정>도 그런 이유로 소재의 선택부터 실패하기 어려운 이야기였을 것이다. 실제 있었던 1923년의 ‘황옥 경부 폭탄 사건’을 모티브로 하였다. 실제 하였던 황옥이라는 인물의 정체성으로 ‘밀정’이라는 커다란 ‘딜레마’의 존재를 만들어 낸 것이다.
답 없는 선택지 ‘딜레마’
‘나가서 싸우자니 총에 맞아 죽을 것 같고, 가만히 있자니 폭탄이 떨어져 죽을 것 같다.’
이렇듯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하더라도 불행에 빠지게 될 것이 뻔해 보이는 경우에 우리는 ‘딜레마에 빠졌다’고 말한다. ‘딜레마(Deilemma)’의 어원은 그리스어의 di(두 번)와 lemma(제안 ·명제)의 합성어로, 진퇴양난(進退兩難) ·궁지(窮地)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지만, 원래는 삼단논법에서의 특수형식을 일컫는다. 어느 쪽을 취해도 나쁜 결과가 나올 것이라 증명하는 강한 주장의 논법 중의 하나였다. 논거의 논법을 모른다 하더라도 우리는 ‘딜레마’의 선택지에 마주 설 경우가 없지 않아 많이 있다. 선택지는 두 가지뿐인데 두 가지 중에 무엇을 선택하든 내게 완전한 행복이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딜레마에 빠진 사화나 인물들은 참 많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하지만 주목받지 못한 딜레마가 ‘빌라도의 딜레마’일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이라 자처하며 군중들을 선동하는 나사렛 사람 예수를 재판에 세운 로마 파견 총통 본시오 빌라도의 딜레마는 인류 최대 사건이라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가려져 있는 한 인간의 고뇌를 이야기한다.‘빌라도의 보고서’라는 문건으로 그 고뇌와 딜레마에 대한 고충을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을 볼 수도 있는데, 이렇다 할 위법사항을 찾지 못해 그를 십자가형에 처하자니 무고한 사람에 대한 괜한 핍박이라 생각이 들고, 그를 방면하려 하면 예수를 이용하여 입지를 다지고자 하는 토호세력인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가이들의 저항이 두려워진다. 십자가에 처하든 방면하든 빌라도 자신에게 득이 될 것은 어느 하나 없어 보인다. 그래서 빌라도가 취한 얄팍한 결론은 대중들에게 그 책임을 묻는다. 도적 바라빠와 예수 중에 누구를 십자가형에 처할 것인가 본인이 결정하지 않고 대중들에게 묻는다. 그리곤 예수의 처형을 본인의 결의가 아니라고 여기며 손을 씻는다. 실제로 물을 받아 손을 씻는다.
이 ‘손을 씻는 행위’에서 딜레마에 빠진 이정출(송강호)을 오버랩할 수 있었다. 이정출은 경성행 기차에서의 해프닝 후 의열단과의 관계를 의심받지 않기 위해 열차에서 몸을 던진다. 그런 그를 기다린 경무국 부장의 명령은 잡혀온 의열단 단원 연계순(한지민)을 고문하라는 것이었다. 을러도 보고 회유도 하면서 연계순에게 김우진의 행방만 말하면 고문을 그만두겠다 말하는 그는 딜레마에 빠진 사람의 전형이었다. 고문을 하자니 의열단과 교류하면서 쌓은 친분의 그녀에 대한 애틋함이 몰려오고, 고문을 하지 않자니 자신의 밀정 행위를 추궁받고 탄로 날까 전전긍긍하게 된다. 결국 주저함 끝에 그녀를 고문하고 돌아선 이정출은 손을 씻는다. 손을 씻는 이정출 분의 송강호를 보면서 손을 씻는 또 다른 송강호를 떠올리게 된다. 바로 영화 <사도>에등장한 영조(송강호)의 모습이다.
‘딜레마’의 상호 텍스트
45년 동안 왕위에 있었던 아비 숙종의 아들로 태어난 영인군(영조)이 무언가 결정하기 이전에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게 된 이유가 바로 정통성, 즉 적통에 대한 '떳떳하지 못함'이었다. 천한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당파싸움의 한가운데서 왕위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 정통성에 대한 도전을 정면으로 받아 내지 않고, 대세의 기운을 따르고 때로는 타협하며 이루어 낸 빛깔 좋은 '탕평책'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런 영조가 가장 바라는 것은 자신 후대의 임금만큼은 적통의 왕세자였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사도세자는 탄생부터가 NG였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영조의 마음은 예수를 십자가에 매단 빌라도의 마음과 닮아 있다. 영조는 어려운 결정이 듣기 힘든 말을 들은 날에는 귀를 씻고,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하라 명하고 손을 씻는다.
이렇듯 영화 <밀정>은 영화 자체보다 주연 배우나 감독의 이전 작품들과 ‘상호 텍스트’ 하는 울림이 있는 영화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연을 맡은 송강호야 말로 ‘딜레마’를 표현하는 거장 중의 거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이전 작품 <반칙왕>, <우아한 세계>, <박쥐>, <푸른 소금>, <복수는 나의 것> 그리고 <효자동 이발사> 까지 그는 언제나 ‘딜레마’ 안에 빠진 개인을 연기하면서 사회와 역사 그리고 종교와 철학을 이야기했다. 그는 의심, 곤혹스러움, 분노, 능청스러움 등 다양한 감정을 표정에 담아내면서 딜레마에 빠진 사람을 그대로 표현해 내었다. 배우뿐이겠는가, 김지운 감독의 이전 작품 중 ‘실패한 복수’를 이야기하는 <달콤한 인생>, <악마를 보았다>를 보면 자신에게 닥친 재앙 같은 불행을 마주하고 어느 하나 행복할 수 없는 선택지를 들고 있는 인생을 그렸었다. 그 답답하고 비참한 딜레마에 갇힌 인생을 보면서 묘한 카타르시스를 얻기도 한 것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딜레마 탈출의 해법 ‘상식’
올해 한국영화들은 양적으로나 성적으로나 풍년이다. 천만을 넘어서거나 육박하는 작품들이 대거 쏟아져 나오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은 좀처럼 관객들의 머리에 남아 있지 않다. 경제도 어렵고 사회도 어려운 이 시기에 한국영화만이 그 질적 성장과 양적 팽창을 통하여 어마 어마한 약진을 하고 있는 듯이 착각이 들 정도이다. 결론만 말하자면 정말 착각이다. 이전에도 ‘좋은 영화’에 대해 그 기준의 모호함, 혹은 부조리함에 대해 이야기한 적은 있었다. 그리고 ‘잘 만든 영화’에 대한 기준도 마찬가지라 언급하였다. 추석 무렵 그 논쟁의 대상으로 추가될 영화 <밀정>이 개봉되었고, 지금 700만을 넘어 곧 천만 관객을 향해 거침없이 흥행 중이다. 하지만, 솔직한 심정은 많이 씁쓸하다. 영화 <밀정>은 감독 김지운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연초 <아가씨>의 박찬욱 감독, <덕혜옹주>의 허진호 감독 같이 거장의 반열에 오른 감독들과 일맥이 상통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참 매끄럽게 잘 만들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아쉬웠다. 그의 지난 작품에 스며든 어둡고 침울한 분위기에 절대 평면적이지 않은 인물을 배치하여 ‘실패한 복수’의 코드로 풀어낸 작품들이 무색해졌다. 아마도, 일제 강점기의‘밀정’처럼 아니면 이 천년 전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시킨 ‘빌라도’의 속마음처럼 현실과 이상의 줄타기를 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배고픔은 꿈꾸는 것보다 직관적이기 때문이다. 이 또한 딜레마가 아니겠는가.
딜레마에 빠진 것이 거대 역사적 사건과 비극적인 사건 앞에 선 사람뿐 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늘 딜레마에 빠져 선뜻 고르기 힘든 선택지를 강요받으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요즘은 선 그어 피아(彼我) 구분 짓기가 만연하다. 보수와 진보로 나뉜 것은 엊그제 이야기이고, 이제는 출신과 천한 자본의 척도로 숟가락으로 선을 그어 계층을 구분한다. 사용자와 노동자가 나뉜 것은 이미 오래된 이야기이고,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혼재된 상태에서 생물학적 자웅의 구분도 심상치 않아 보인다. 이런 선 긋는 세상에서 우리 자신은 선 그어 놓은 영역에 놓여 있기보다는 그 선들 위에 아슬아슬 줄타기하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선에서 뛰어내려 이 쪽이든 저 쪽이든 내려서기 힘든 세상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어느 쪽이라도 누군가는 손가락질하고 누군가는 욕을 날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런 선택의 딜레마에 빠진 경우 가장 바람직한 선택은 무엇일까? 개인의 기준마다 다르게 작용하겠지만, 내게는 그 기준이 ‘상식’이 되었으면 한다. 그 보편적인 ‘상식’마저 작동하기 힘든 세상에서 ‘상식적’으로 행동하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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