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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읽기

[영화리뷰: 칠드런 오브 멘(2006,Children of Men)] 운명과 신념의 사이에 놓인 세계

by 박 스테72 2020. 2. 9.

인간 스스로 종말을 초래한 사건이 있은 후 유일한 국가 기능을 하고 있는 2027년의 영국에는 아직 ‘보안령’이 발효되어 엄격히 통제되고 있다. 인류에게 내려진 최대 재앙은 한순간의 폭격이나 전쟁 혹은 바이러스 같은 ‘호환마마’ 같은 외부의 위협이 아니었다. 더 이상 인류의 종족을 이어 갈 수 없는 재앙, 바로 전 인류의‘불임’의 재앙이 찾아온 것이다. 그렇게 내일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2027년 11월 어느 날, 인류의 최연소자인 만 18세 청년 디에고는 사고사라 전달되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고, 전영국은 깊은 침울에 빠진다. 그러던 어느 날 매일을 알코올의 힘으로 버티며 사는 수도관리국에서 일하는 테오(클리브 오웬)는 영문 없이 떼거리에게 납치가 된다. 그곳에서 20여 년 전 대정부 투쟁을 했던 전처 줄리안(줄리안 무어)을 만나게 되고 생각지 못한 부탁을 받는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이기도 하고 여전히 마음속에 담아 둔 옛사랑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테오는 미지의 소녀 키(클레어-호프 에쉬티)를 해안까지 데려다주는 일에 동참하게 된다. 쉽지 않은 일이라 예상은 하였지만, 데려다주는 길에 강도들의 습격을 받아 줄리안을 잃고 의지할 데 없는 키는 테오에게 어마 어마한 비밀을 밝히게 되는데. 테오는 줄리안의 요청대로 키를 ‘미래호’라는 배에 무사히 태울 수 있을까? 이민자 소녀 키의 비밀은 도대체 무엇인가?

또다시 ‘디스토피아’

시기가 엄중하고 무겁고 암울하여 그런지, 요즘 눈에 들어오는 영화에서는‘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소재로 한 ‘디스토피아’ 장르의 언어를 많이 읽게 된다. 두어 달 전에 포스팅한 <이퀄스(2015)>와 같이 직접적인 장르로 이야기하는 영화부터, <엑스맨>, <헝거게임> 등과 같은 SF적 블록버스터, 그리고 <부산행> 등의 좀비물까지 영화는 세상의 모습을 영화의 언어로 풀어내고 있는 듯하다. 그만큼 이 세상은 종말 직전이거나 어쩌면 이미 종말이 지나갔는데도 인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의 아수라 판일지도 모른다. 영화 <칠드런 오브 멘>은 그러한 ‘포스트-아포칼립스’, ‘디스토피아’ 영화들 중에 가장 현실감으로 다가오는 영화이다. <멋진 신세계>, <이퀄 브리엄>, <하이-라이즈> 같은 영화들은 종말 이후의 세상에 대한 디스토피아를 몽환적이거나 모호한 차원의 세계로 그려 그저 ‘공상’의 재료를 전달해 주지만, <칠드런 오브 멘>은 2027년이라는 멀지 않은 미래에 대한 확정된 시간과 그만큼 현실과 크게 괴리되지 않은 현실적 배경의 설정으로 매우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더욱이 이 영화는 10년 전에 만들어졌지만, 마치 10년 후의 오늘날을 예견이라도 영화의 메시지는 ‘예언’에서 ‘예측’으로 다가오고 있다.

상의 종말적 사건이 찾아온 뒤 인류는 ‘불임’이라는 최후의 징벌적 재앙을 마주한다. 마지막 태어난 인류였던 청년은 셀럽처럼 인기를 누리다 불의의 사고로 만 18세의 명을 다한다.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쓸고 간 세상을 통제하는 것은 간절한 미래의 희망을 품은 사람들의 선의가 아니라, 그저 지금, 여기가 중요한 사람들의 욕구일 뿐이다. 인류에 내일이 없을진대 지금의 비상식적인 폭거나 제압은 역사에 기록될 일도 없고, 내 후손에게 미안할 필요도 없으니, 힘이 있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최후의 권력을 누릴 뿐이다. 테오가 여행 허가증을 얻기 위해 방문한 친척인 ‘미술품 보전청’ 리더인 나이젤(대니 휴스턴)의 일상은 최고의 권력을 가진 자들의 일상일뿐이다. 폭격에 손상된 ‘다비드 상’을 현관 입구에 배치하고, ‘게르니카’가 걸린 식당에서 성찬을 즐긴다. 눈 아래 펼쳐진 암울한 서민들의 세상을 멀찍이 내려다보며 와인을 즐길 뿐이다. 100년 후면 이런 예술품들을 볼 사람도 없을 진데왜 이리 정성 들여 모으고 관리하느냐는 테오의 질문에 나이젤은 담백하게 대답한다.

“내일은 중요하지 않아, 나에게는 오늘 지금만 중요할 뿐이야.”

내일을 알 수 없어서가 아니라 내일이 없다는 기정사실에 TV에서는‘Quietus’라는 편한 자살을 주는 약제 광고만 넘치는 세상에는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사람들에게 이제 기대하고 희망하는 ‘신념’이란 온 데 간데없고, 그저 언젠가 끝만 오겠지라는 ‘운명’만이 가득할 뿐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을 용기는 없는 그런 날들의 연속인 것이다. 이야말로 ‘천벌’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신념의 반대쪽에는 운명이 있다.”

시골에 숨어 히피 같은 말년을 보내고 있는 테오의 친구 제스퍼(마이클 케인)가 18년 만에 임신한 소녀 키에게 말을 건넨다. 무언가 믿음으로 기대하는 신념의 반대 편에는 늘 운명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종말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권력자들은 그저 자신들만의 오늘을 즐기기 위해, 다수의 사람들을 제압할 뿐이다. 그에 맞선 이민자들, 반정부 세력, 그리고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일말의 ‘신념’을 찾기 위해 저마다의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다. ‘운명론자’들은 다른 생각 없이 그저 오늘의 자신을 지키는 것이 목표지만, ‘신념을 찾는 자’들은 그 신념의 모습이 너무나도 다양하여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이용할 뿐이다. 그나마 생존이 가능한 땅 영국으로 모여든 다수의 이민자 ‘푸지(아마도 refugee에서 온 별칭)’, 그 푸지들의 권리와 반정부 활동을 무력으로 시위하는 ‘피시당’, 자신을 고문하며 속죄하는 ‘단절파’, 그리고 구원을 위해 도를 닦는 ‘회개파’등 신념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저마다의 색깔로 섞일 수 없이 존재할 뿐이다. 그나마 가장 체계적인 조직으로 보이는 ‘휴먼 프로젝트’만이 이 인류의 종말의 결론을 바꿀 유일한 희망으로 보이나, 그들을 직접 보거나 만난 사람이 없고 말로만 전해지는 이들만 믿고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영화는 암울한 종말 운명의 시대를 어둡게 그리고 있다. 하지만 그 반대 편에 실낱 같은 희망 신념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류는 크고 작은 운명과 신념의 줄다리기를 통해 지속 가능한 원동을 얻었다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야기의 축은, 시간이 어찌 가는지 모를 영화의 완성도 덕분에 디스토피아의 세상에서의 사건을 쫓아가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매우 익숙한 이야기라는 기시감이 들게 된다. 바로 2천 년 전 인류의 최대 사건이라 할 수 있는 ‘나사렛 예수’의 탄생과 그 시절의 모습을 떠 올리게 된다. 난민 수용소 누추한 매트리스에서 태어난 키의 아이 ‘딜런’의 탄생은 베들레헴 마구간의 아기 예수를 떠올리게 된다. 아이의 아빠가 누구냐는 테오의 질문에 키는 농담 삼아 처녀라 이야기하는 모습이나, 자신의 아이가 아닌데도 아이의 탄생과 안전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내어 놓은 테오의 모습에서는 예수의 부모인 마리아, 요셉을 떠올릴만하다. 온갖 신념을 쫓는 일당들이 난무하는 태세에서는 사두가이파, 바리사이파, 율법학자, 그리고 열성당원 등 그 신약 시절 유대의 땅의 혼란과 유사하다. 테오의 친척 고위 관료인 나이젤에게서는 조심스럽게 본시오 빌라도의 모습도 보인다. 동방박사부터 시작된 세상의 경배는 총격전 틈에서 새로 태어난 아기를 보고 찬양하는 이민자들이나 총격도 멈추고 길을 터주는 군인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더우기 테오으 일행을 사심없이 도와 주는 사람들은 영어 한마디 되지 않은 이방인이거나 히피의 삶을 사는 사람인 주변인인 것도 예수의 시대와 유사하다. 인류의 대사건인 예수의 탄생과 그의 죽음 그리고 십자가의 희생 같은 일은 심판의 날 이전에는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았지만, 이천 년이 훌쩍 지난 이 희망 없는 시대에 예전 그 모습으로 다시 등장하는 것이다. 그만큼 인류의 지속을 위해서는 또다시 기적 같은 대사건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신의 아들이던 새로운 생명이던 말이다.

암울한 오늘로 실낱 같은 희망을 말하는 영화

멕시코 3대 거장 중 하나인 알폰소 쿠아론은 우리에게도 이름보다는 영화로 잘 알려졌다. 가장 최근의 <그래비티>부터 <해리포터 아즈카반의 죄수>, <이투 마마> 등 이야기로나 영상미로나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든 뜨거운 감독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촬영감독 엠마누엘 루벤즈키와 만들어 낸컷과 테이크는 <그래비티> 보다 7~8년 이전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경이롭다. 특히 마지막 7분의 롱테이크 총격신은 21세기 들어서 최고의 촬영이라 꼽아도 손색이 없을 어마 무시한 연출과 촬영을 보여준다. 영화는 기술적인 연출과 촬영뿐 아니라 기획과 각색에 있어서도 엄지 척 내밀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다. 원작 소설의 기본적인 설정만 가지고 왔을 뿐 전체적인 구성이나 인물, 결말까지도 완전히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어 낸 기획은 정말 압권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 줄리안 무어와 클리브 오웬뿐 아니라 각자의 역을 현실감 있게 그려낸 배우들의 캐스팅도 나무람이 없어 보인다. 특히 줄리안 무어의 창백한 피부와 맨 얼굴에 숨어 있는 중의적 감정의 모습은 ‘디스토피아’ 장르에 최적이라는 생각이 다시 들기도 하였다. (<눈먼자들의 도시> 등)

미래를 이야기하는 문학이나 영화는 밝고 희망찬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아마도 살면 살아 갈수록 갑갑해지는 현실의 무게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성만 증폭되는 세태의 영향일 것이다. 그만큼 영화는 현실을 응축하여 이야기하는 힘이 있다. 스토리를 전달하는 예술의 매체가 그러하듯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과 듣고 이해하는 사람의 변용에서 세상에 대한 많은 꼭짓점을 이어 갈 수 있기 때문에 영화보기는 늘 유효하다. 멀리 지구촌을 볼 것도 없이 이 나라 대한민국만 본다 해도 ‘디스토피아’적인 암울한 미래는 쉽게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의 어이없는 상황을 다시 말해 무엇하겠냐마는, 10년 만에 마주한 영화 <칠드런 오브 멘>은 가슴 아프게도 10년 전에 오늘의 모습을 예견한 예언장과도 같다. 가진 자들은 자신이 거머쥔 권력과 재력을 놓지 않으려 세상의 다수와 담을 쌓고 그들을 불합리하게 제압한다. 그들에게는 ‘내일’이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나와 내 가족, 그리고 오늘이 풍족하고 누릴 수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 담벼락 아래 군상들도 영화의 모습대로 이다. ‘신념’은 ‘옛날에~’, ‘소싯적에~’라는 넑두리에만 가두어져 있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극단적인 근시안적 문제 해결에 함몰되어 있다. 그나마 ‘신념’을 쫓으며 세를 넓히려는 사람들은 갈기갈기 찢겨 파편화되어 있다. 항거의 세력 인체 가진 자의 뒤를 쫓는 재야의 정치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기-승-전-이즘(ism)으로 모든 사안을 결론짓는 ‘~주의자’들도 답이 없긴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희망’이고 ‘내일’인데 말이다. 과연 우리 가슴에 ‘희망’이라는 것과 ‘내일’이라는 것이 있을까? 그 답은 스스로의 헌신이 중요할 것이다. 이전에 말한 적이 있는데 희생과 헌신은 작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헌신은 언제가, 직간접적으로 보상을 받는다는 전제를 가지는 행위인 것이다. 모두의 ‘희망’이 가시화되어 있다면 자신의 ‘신념’은 잠시 누그려뜨릴 수 있는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신념의 꽃은 희망이 현실이 되고 내일이 오늘이 되었을 때 피우면 되는 것 아닐까?

부족한 마음과 손이지만, 내일도 거리에 나가 모두의 ‘희망’을 외쳤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양한 ‘신념’을 잘 들어 모으는 그런 시간의 시작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답답한 시국이 제자리를 찾아 좋아하는 ‘사랑 영화’를 맘껏 보고 나누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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