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명의 청춘 록키(제인 레비), 알렉스(딜런 미넷), 머니(다니엘 조바토)는 생기라고 찾아보기 힘든 도시 디트로이트에 사는 빈집 털이꾼들이다. 알렉스 부친이 근무하는 사설 방범업체의 정보와 마스터 키 등을 이용해 중범죄가 되지 않은 일 만 달러 이하의 현물만 털어 장물아비에게 넘겨 돈을 마련하는 것이 그들의 주된 수입원이며 일과이다. 생각보다 시원치 않은 현금화와 40%의 높은 수수료 때문에 답답하던 차에 장물아비로부터 혹하는 정보를 듣게 된다. 사람이 빠져나가 인근에 사람이 없는 어느 허름한 동네에 이라크전에서 퇴역한 군인이 사는데, 그 노인의 외동딸의 뺑소니 사고 합의금을 받았다는 사실과 그 거금의 현금을 집안에 보관하며 살고 있다는 이야기다. 돈이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머니는 물론 지긋지긋한 집구석에서 동생과 탈출하여 캘리포니아로 도망가고픈 록키는 주저하는 알렉스를 꼬드겨 내는 데 성공한다. 현장 정보를 수집하던 중 그 퇴역군인은 이라크에서 수류탄 폭발로 두 눈을 실명했다는 것과 사나운 개와 함께 살며 집 밖으로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드디어 실행의 그날이 되고 어둑해진 밤에 그들은 퇴역군인의 집으로 숨어드는데, 그들은 바람대로 현금을 손에 들고 캘리포니아 드림을 마주하게 될 수 있을까?
영화를 제법 좋아한다 말하고 다니면서도 개인적으로 주저하는 장르는 있는 법이다. 내게는 ‘공포영화’가 그러하다. 나름 근육 좀 달고 다니는 마초 외모를 가졌지만 공포영화를 보는 것은 좀처럼 쉬이 익숙해지지 않는다. 화면 밖으로 아무것도 실현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움찔 움찔대며 실눈을 가늘게 뜨고 영화를 마주하는 모습이 불편하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 들킬까 불안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무시 무시한 어둠의 장르를 포기 못하는 이유는, 이 장르적 특성이 주는 이야기의 쫀득함이 중독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맨 인 더 다크>는그런 장르의 전형적인 이야기 플롯을 잘 담아낸 공포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폐쇄된 공간에 정체 모를 능력을 가진 자와 마주하게 되고, 그 마주한 사람이 인정 사정없는 폭압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따라 도주하다 막다른 골목에 가로막혀 그 존재보다 더 무시 무시한 진실을 마주하여 아연질색을 넘어 기절초풍하게 되는 그런 플롯은 정말 쫀득쫀득하다. 감독(페데 알바레즈)의 데뷔작인 <이블데드> 리메이크 판에서 보여준 사방팔방으로 피 튀김의 하드고어는 줄어들었지만, 장르적 플롯의 전형성으로 공포감을 고조시키는 장치는 더 강화되었다. 공포는 인간이 가진 개인적인 감정중의 하나이다. 그 감정 중에서 가장 연약한 감정이다. 내가 무서워하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에 다른 사람도 공통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하기 마련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포감은 사회적인 감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요즘의 시대에 영화가 주는 공포감은 불편하다 못해 불안하다. 영화관 밖은 더 불편한고 위험하기 때문이다.
눈먼 사람이 등장하는 스릴러 영화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멀리 <어두워질 때까지(1967)>, <블라인드 테러(1973)>로부터 최근 <눈먼 자들의 도시(2008)>, <줄리아의 눈(2010)>까지 공포 스릴러 영화에 단골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눈먼 사람이 나오는 영화는 많지만, 눈이 머는 과정을 그리는 영화는 많지 않다.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은 슬프고도 힘겨운 일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잃으면 다른 무언가를 곧 얻게 된다. 눈이 먼다는 것은 결과라기보다 변화의 과정이다. 물론 그 변화는 고통스럽다. 무언가 얻게 되는 결과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 변화를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그래서 과정의 설명이 없는 결과적인 실명의 인물은 대부분 인격을 상실한 본능적 존재에 가깝게 그려지기 마련이다. 왜 상실되었는가에 대한 생각은 온데 간데 없고, 그저 상실된 상태만 남는 상태, 그 상태는 참 위험하다.
“신이 없다고 알게 되는 순간,
사람이 하지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돼.”
눈먼 노인의 손에 잡혀 사지가 결박된 록키는 ‘신’을 찾으며 마지막 기적을 호출해 보지만, 아무것도 잃을 게 없다는 태도의 노인은 차갑게 대답한다. 막다른 골목에서 신의 존재라는 것은 없다 것을 아는 순간 인간은 어떤 선택지를 고를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 샘이다. 사건의 발단이자 이유가 되는 거금의 현금은 생각보다 일찍 등장하게 된다. 이 순간 이 ‘돈’은 영화에서 맥거핀에 가깝게 존재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그 최초의 이유 같은 것은 실종되어 버린다. 영화는 관객들이 록키와 알렉스와 같이 어둠 속에서 처하는 극한의 공포를 경험하게 해 준다. 그 경험은 보이지 않는 두려움과 극한 공포감을 잘 느끼게 해 준다. 그 여정의 끝에서 이 사건이 시작된 이유, 돈의 의미와 그것에 가려진 보이지 않았던 진실을 보게 해 준다. 그러나 영화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진짜 진실이 드러난 이후의 이야기는 공포감에 대한 사회적인 의미를 말하고 있다. 영화는 눈먼 사람들 모두가 위험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무지 막지 한 폭력을 휘두르는 눈먼 노인도 위험하고 돈에 눈이 멀어 위험만 기대되는 미로 속에 자꾸 기어 들어가는 청춘들도 위험하다. 마지막 장면에 이 사건을 단순 강도 사건으로 리포팅하는 눈먼 뉴스 미디어도 위험한 것이다. 영화가 묘하게도 지금의 세상과 맞닿아 있는 이유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 중 ‘선한 사람’은 없다. 상황이 뒤집히는 상황에서 강한 자와 약한 자는 연거푸 자리바꿈을 한다. 나라를 위해 전쟁에 참전했다 두 눈을 잃는 것도 모잘라 단 하나뿐인 딸을 졸부의 음주운전으로 잃은 노인의 처지는 애처롭다. 그러다가 영화가 진행되면서 ‘노인’이라고 부르기 무색한 근육덩어리 눈먼 노인의 무시무시한 폭력에 나가떨어지는 10대들이 가엽기까지 하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역이 서로 뒤 섞이고 선한 자는 없고 누가 덜 악한지 가려내야 하는 관객의 입장이 여간 곤란한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이 그러한 지경이다. TV에 등장하는 ‘길라임’으로 빙의한 광녀들과 그 무리들이나, 우왕 좌왕 주판알만 굴리는 정치 무리배들 모두 나쁜 사람들이다. 갑갑하고 엄중한 시기에 무고한 국민들은 ‘덜 나쁜 것들’을 가려내에‘가장 나쁜 것들’을 처리하려 매주 거리로 나온다. 두 눈과 두 귀를 막고 자신의 처지만을 생각하는 ‘자기애’로 똘똘 뭉친 폭거 잠재적인 정권이나, 그 정권의 치부를 간파하고 정당하지 못한 도둑질로 그 권력을 찾으려는 정치꾼들이나, 이 모든 것들이 그저 ‘사건 사고’라는 보도를 내뿜은 뒷북 방송이나 모두가 공포스러운 존재인 것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처럼, 저 눈먼 자들의 틈에서 살아 남기 위해 눈먼 척을 하는 것이 맞을지, 제대로 보이는 것을 선언하고 대항하는 것이 맞을지 선택의 딜레마는 언제나 민초들의 몫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참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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