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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읽기

네 걱정에 기쁨을 섞어라 - 돈키호테, 만우절, 그리고 생일

by 박 스테72 2023. 4. 2.
‘대답은 멈추는 것이고 질문은 건너가는 것이다.’
- 최진석 [나를 향해 걷는 열 걸음] 중에서 -

대답이란 틀에 박혀 버린 뻔한 것이다. 질문은 끊임없이 이동하고 변화하는 살아 숨 쉬는 것이다. 이 세상을 이루는 모든 요소, 개념, 이론, 정의, 정리, 철학, 미학 등은 대답에서 나온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모두 질문이 잉태한 결과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가야 하는 일은 두렵다. 보통 ‘건너가는 곳’은 가본 적이 없고 알지도 못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막연하게 우리는 위험하다고 생각하며 주춤거리기 일쑤다. 그 두려움을 딛고 한 걸음을 열 걸음으로 만드는 일은 사뭇 거룩하다. 이 걸음을 우리는 ‘용기’라고 말한다.

 

독일 화가 스테판 마트(Stefan Mart)가 그린 돈키호테와 산초

 

‘돈키호테’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스페인 문학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거니와 뮤지컬 중에 가장 좋아하는 <맨 오브 라만차>의 원작에 나오는 괴상한 늙은 기사일 뿐이다. 그러나 돈키호테의 모험 아닌 모험 속에는 건너는 자의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질문하는 자의 이야기다. 그리고 질문하는 자는 자신의 우주에 대한 주도권을 지니고 산다. 돈키호테는 이런 의미에서 허튼짓만 하는 괴팍한 몽상가이거나 현실 감각을 잊어버린 옛날에서 못 벗어난 낡은 존재가 아니다. 그 자체로 용기이자 질문이다.

자칭 편력 기사(떠돌이 기사)인 돈키호테 데 라만차와 애마 로시난테, 그리고 순진한 산초의 모험집으로 잘 알려진 이야기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이 <돈키호테 데 라만차>의 결말이 어떠한지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저 풍차에 돌진하는 미친 기사의 일화를 들어 이해하는 문학사에 길이 남을 ‘돌아이’로 기억할 뿐이다. 돈키호테의 결말은 새드 엔딩이다. 그 슬픈 결말의 중심에는 ‘제정신으로 돌아온 돈키호테의 무력’이 자리 잡고 있다. 멀쩡한 사람인 듯 돌아온 돈키호테의 모습에서는 괴짜다운 편력 기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말이다.

 

“자네 자신에게 눈길을 보내 스스로 어떤 인간인지 알도록 노력하게. 이것은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지식일세. 자네를 알게 되면 황소와 같아지고 싶었던 개구리처럼 몸을 부풀리려는 일은 없을 게야.”

- <돈키호테 2권> 열린책들 -

 

<돈키호테>는 누구나 아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전집이 세 권에 달하는 원판 번역을 읽어 내리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 청소년기에 접했던 교육용 요약본으로 전부를 읽은 것처럼 착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원본을 접하라고 추천하고 싶다. 이유는 그 문장 하나하나가 문학이며 철학이고 처세이자 교본이 되는 말들이 넘쳐난다. 밑줄을 긋다가 어느새 까맣게 변해버린 책 페이지를 마주하게 된다. <돈키호테>가 내 마음에 들어와 자리를 잡은 이유는 위의 문장이었다. ‘돈키호테’라는 사람을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주저 없이 ‘나를 섬기는 자’라고 하고 싶다. 최진석 교수의 표현을 빌려 온 것인데, 노자의 ‘도덕경’의 한 구절을 들어 설명한다. ‘승인자유력 자승자강(勝人者有力 自勝者强)’. 풀이하자면 ‘남을 이기는 사람은 힘만 드러낼 뿐이고, 나를 이기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강한자다.’라는 말이 된다. 돈키호테는 전 재산을 팔아 책을 사고 그 책에 파묻힌 후 딱 한 권을 골라 읽고 또 읽어 낸다. 자기 몸에 밴 버릇과 함께 타인의 시선을 모두 이겨낸 자가 진정한 강자라는 이야기다.

 

내 생일날의 장르는 언제나 ‘로맨스’

매년 4월 1일에만 거짓말같이 나타나는 작은 나라가 있다. 바로 리투아니아라는 나라 속에 있는 '우주피스(Užupis) 공화국'. 이곳은 원래 유대인이 많이 살던 마을이었는데, 2차 세계대전 시에 이 지역 유대 인구 대부분이 나치의 대학살 때 사망한다. 곧이어 소련의 강제 점령으로 폐허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버려진 빈집들에 예술가와 보헤미안이 찾아들면서 파리의 몽마르트르, 우리나라의 헤이리 예술인마을처럼 예술가들이 거주촌으로 유명해진 마을이 되었다.

 

우주피스 공화국 (출처=KBS <걸어서 세계 속으로>)

 

공식 인가는 없지만, 1997년 4월 1일 독립 공화국을 선언한 이후 매년 4월 1일 24시간 동안만 이 동네는 마치 하나의 작은 나라처럼 변신한다. 형식상으로 외지인들은 여권으로 출입이 가능하다. 그들만의 대통령, 국기, 10여 명의 상비군, 헌법, 화폐도 있는 국가체계를 갖고 있고 전 세계적으로 500명 이상의 대사를 파견하기도 한 나라다. 벽면에 한글로도 쓰여 있는 41개의 헌법 내용은 눈길을 끌기 충분하다.

  •  모든 사람은 겨울철 온수와 난방과 기와지붕을 가질 권리가 있다.
  • 모든 사람은 실수할 권리를 가진다.
  • 모든 사람은 게으르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 모든 사람은 행복할 권리를 가진다.
  • 모든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
  • 이기려고 하지 마라, 포기하지 말라…'

헌법 조문 하나하나 멋지고 낭만적인 헌법이 아닐 수 없다. 인생이란 게 이처럼 로맨스였으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현실은 늘 버티기 힘든 날들이지만. 그래서 그런지 몇 해 전에 개봉한 코미디 영화 <장르만 로맨스>에서도 이 '우주피스 공화국'의 모습으로 피날레를 장식한다. 안 보신 분들은 꼭 보시기를.

만우절에만 나타나는 신기루 같은 공화국의 이야기를 한 이유는 이날이 특별한 날이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같이 매년 찾아오는 날이라 특별할 수도 있고, 영원한 미소년 이미지의 아름다운 배우 장국영의 갑작스러운 비보가 찾아든 날이라 잊을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한 분기가 지나고 새로운 분기가 시작되는 새로운 날이며, 보통 춘분이 지나 부활절을 품고 있는 서구에서는 농번기로 접어드는 중요한 날이다. 이 만우절의 유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쏟아 낸 적이 있었다.

https://m.catholictimes.org/mobile/article_view.php?aid=272386

 

https://m.catholictimes.org/mobile/article_view.php?aid=272386%EF%BB%BF

 

m.catholictimes.org

구약의 노아 이야기에서 만우절 유래를 찾기도 한다. 홍수 때 방주를 타고 있던 노아는 물이 빠졌는지 보기 위해 비둘기를 내보냈다. 비둘기는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다시 방주로 돌아왔다. 이렇게 비둘기를 헛수고시킨 날이 4월 1일이라고 해서 만우절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기사 본문 중-

 

창세기에 유명한 이야기 ‘노아의 방주’가 나온다. 할리우드 영화로도 제작된 연유로 이 이야기는 익숙하다. 특히 이 이야기가 세상을 창조한 이야기인 ‘창세기’에 있는 것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40일 동안 퍼부은 큰비로 인해 한 발 내디딜 땅조차 없이 모두 물에 잠기게 된 후, 노아는 까마귀와 비둘기를 차례로 날려 보내며 마른 땅을 찾아 나섰다. 그때 비둘기가 물고 온 감로 나뭇잎을 보고 비로소 땅이 드러남을 알게 되고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준 날, 천지가 새롭게 재창조된 날이 4월 1일이라는 유례가 있다.

바로 노아가 땅을 확인하기 위해 까마귀 이후에 비둘기를 처음 날려 보낸 날이 바로 4월 1일이라는 기원설은 서구에서 익숙한 이야기다. 헛수고가 될 것임에도 분명한 것에 심부름을 보내는 일, 그리고 그 심부름을 묵묵히 해내는 비둘기의 모습이 바보 같다고 하여, 결국 4월 1일은 만우절(萬愚節: April pool’s Day)이 되었다. 이런저런 만우절의 기원 중에 가장 그럴듯한 나만의 선택이다. 이 ‘바보 같은 믿음’에서 늘 ‘돈키호테’를 생각한다.

오늘이 쉰 하고 두 번째의 바보 같고 가난하며 비루한 박 스테파노의 생일이다.

   

꿈을 꾸어라. 이룰 수 없는 꿈을

돈키호테는 온갖 역경을 겪으면서 산초에게 이렇게 말한다.

 

"산초야, 행운은 빼앗을 수 있을지 몰라도 노력과 용기는 빼앗지 못할 것이다."


바라던 것이 오지 않는다고 화낼 필요 없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이지 아예 오지 않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노력과 용기를 품고 꿈을 꾸었는가의 문제다. 노력과 용기는 거짓이 없으며 배신하지 않으니까. 스스로 주인이 되고 자신을 섬기는 일은 말처럼 쉽지는 않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황홀경의 주문을 책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쭈그러진 심장부터 쫙 펴십시오."

 

전전긍긍하고 노심초사하며 살아왔다. 늘 계산 속셈에 빠져 모험하기 십상이었다. 그렇다고 손에 닿지 않는다는 생각에 일찍이 포기해버리는 일도 용납하기 힘들다. 불가능해 보인다는 이유로 도전은 엄두도 내지 않는다면 이미 죽은 생명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이 모든 일은 쭈그러진 심장 탓은 아닐까.

돈키호테는 말한다. 기사로 보이기 위해 애쓰는 천한 사람도 있고, 천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죽자 살자 버티는 고상한 기사도 있다고, 앞선 사람들은 야망이나 포장된 덕으로 스스로 치켜올리고, 뒤에 선 사람은 나약함이나 섣부른 일들로 자신을 낮추기 마련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가난한 기사가 기사임을 증명할 유일한 방법은 ‘덕’ 밖에 없다. 온화하고 교양 있고 신중하며 근면해야 가능한 일이다. 가난한 기사는 그래서 오만하지 않아야 하고, 우쭐대지 말아야 하며, 험담가가 되어선 안 될 일이며, 특히 타인에게 연민과 동정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바쁘다. 마음이 바쁘다.

그 바쁜 마음은 모든 연극이 끝나고 난 후 각자의 차별이라는 의상을 벗어 던지면 모두가 똑같은 존재가 되기 위한 겸허를 선물할지도 모른다. 가난한 기사가 풍차로 돌진하는 무모한 도전은 불가능한 꿈이 아니라 쪼그라진 마음을 펴는 일이다. 가난한 기사에게 유일한 덕을 실천하는 용기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를 넘기며

나이 마흔을 넘기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어느 연배 위의 분께서 마흔이라는 나이를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이 낯설어 보여 힘겨운' 나이라고 충고한 기억이 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스무 살의 낭만’을 건너뛰었고, 현실감에 쫓기어 ‘서른쯤에’ 느낄 감성을 충분히 느낄 수 없었기에 마흔이란 나이가 더 아릿한 모습으로 다가섰다. 그러나 그 아련함을 느끼기도 전에 이미 마흔의 10년은 훌쩍 지나가 버렸다. 오늘이면 쉰하고 두 살이 되었다. 하늘의 뜻을 알아 간다는 ‘지천명’이라는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좀처럼 하늘의 뜻을 쉬이 알기란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진다.

 

Interpone tus interdum gaudia quris.
네 걱정에 기쁨을 섞어라.

- <돈키호테> -

돈키호테를 읽으며 가슴에 담아 둔 한 줄이다. 내 수많은 걱정에 기쁨을 섞으라니, 언뜻 조롱이나 자기 비하가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가려는 자는 질문하는 사람이다. 질문하는 사람은 건너려는 자신을 자각하고 깊게 경험할 때 신묘한 진동으로 품어 들게 된다. 이때 빠지는 경지를 황홀경이라고 한다. 황홀경이란 어쩌면 질문하며 두려움을 극복하여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려는 용기에게 주는 신의 선물일지도 모른다. 아직 잘 알 수 없는 곳에 대한 두려움을 무릅쓰고 모험하는 일에 대한 보상이다. 존재론적 철학에서는 모험을 인간이 쌓는 위대한 탑의 첫 번째 돌이라고 이야기한다.

 

영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에 포스터로 쓰인 그림 (출처=DonQuixote wallpaper)

 

돈키호테가 미쳐 살다가 정신이 들어 죽었다는 이야기는 표면적으로 새드엔딩이다. 그러나 자신만의 언어를 구사하면서 자신을 섬기는 일은 첫 벽돌을 움켜쥐고 외부에 인식되는 거울의 모습이 아닌 고유하고 오롯한 또 다른 각성이었다. 그가 미쳤다는 이야기는 다른 말로 오롯하게 자기의 모습으로 살았다는 증거다. 그는 미쳐 살다가 보통의 존재가 되어 죽었다. 이것은 또 다른 유언이다. 미쳐 살 때는 불가능한 일이라 여기는 풍차와 대결을 벌였지만, 제정신으로 돌아와서 흔하디흔한 종부성사와 평온한 안식을 위해 준비하는 작은 인간이 되어 버렸다. 결국 걱정이 기쁨을 삼켜 버린 것이다. 돈키호테는 이렇게 죽지 말라고 당부하는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외부의 평가에 쪼그라든 심장을 쫙 펴고 살라는 이야기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의 서문을 통해 이야기를 내게 해 주었다. 가난한 자도 명예를 가질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부도덕한 사람은 가질 수 없다. 가난함이 고귀함을 흐릿하게 할 수는 있지만 완전히 어둡게 만들 수는 없다. 불편함이 있고 궁핍하더라고 덕이라는 것은 그 틈바구니로 자신만의 빛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고귀한 사람으로부터 존경받고 보호받는다. 이런 이유로 그가 이야기한 ‘글은 그저 백발로 쓰는 것이 아니라 분별력으로 쓰는 것이며, 분별력이란 나이가 들면서 더 나아지고 한다’라는 말은 가슴에 저절로 담긴다. 분별력이 나아진다는 말이 바로 ‘지천명’의 경지가 아닐까.

영화만큼 뮤지컬을 좋아한다. 뮤지컬 중 좋은 작품들이 참 많지만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맨 오브 라만차>를 이야기한다. 돈키호테의 이야기를 뮤지컬로 만든 작품이다. 이 뮤지컬을 처음 접했을 때는 책으로 느껴지던 돈키호테의 실체를 만나게 된 듯하여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볼품없는 노구에 고집스러운 모험이 그를 괴짜 노인네로만 인식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무디어진 세상의 질문하는 모습에 늘 경고한다. 그의 ‘불가능한 꿈을 꾸어라.’라는 이야기는 무모함을 조장하지 않는다. 틀을 깨고 본질로의 도달을 위한 끊임없는 질문을 촉구한다.

가난하고 가진 것 없는 중년이 나름 세상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플랫폼과 하는 겨루기는 ‘허튼짓’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하는 일과 내가 꿈꾸는 세상이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지라도, 계속 질문을 던지는 꿈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오늘도 이룰 수 없는 꿈을 꾼다.

 

뮤지컬 < 오브 라만차> ‘이룰  없는 

https://youtu.be/0e_i93mSX54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싸움, 이길 수 없어도
슬픔, 견딜 수 없다 해도
길은 험하고 험해도

정의를 위해 싸우리라
사랑을 믿고 따르리라
잡을 수 없는 별일지라도
힘껏 팔을 뻗으리라

이게 나의 가는 길이요
희망조차 없고 또 멀지라도
멈추지 않고, 돌아보지 않고
오직 나에게 주어진 이 길을 따르리라

내가 영광의 이 길을 진실로 따라가면
죽음이 나를 덮쳐와도 평화롭게 되리

세상은 밝게 빛나리라 이 한 몸 찢기고 상해도
마지막 힘이 다할 때까지
가네 저 별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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