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수꾼은 새벽을 기다린다.
영화의 종반부에 세 친구들이 동윤의 집에서 보낸 밤에 대하여 짧은 언급과 덤덤한 씬이 나온다.
깊은 잠 들지 못한 동윤이 마른 입 때문인지 잠결에 느낀 기척 때문인지 거실로 나와 기태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다. 그들의 덤덤한 이야기가 심심했는지 카메라도 거울로 애써 색다른 shot을 잡아 내고 있다.
이미 깊은 잠이 들어 두 친구의 대화 속에 묻힌 희준,
잠을 청하여 침대에 누웠으나 친구의 밤샘 기척에 마음 쓰이는 동윤,
쉽게 털고 잠을 청할 수 없는 답답함에 깊은 밤을 새우는 기태의 모습이 담긴 이장면이 머리 속에 남아 떠오름을 반복한다.
이 짧고 덤덤한 장면이 앞으로 닥칠(시간적 순서에서) 일들을 이야기 해 준다.
너무나 덤덤하여 앞선 영화의 이야기(영화적 순서에서)가 지독하게 먹먹하게 다가 온다.
'파수꾼'은 밤을 세우며 새벽을 기다린다.
바쁘고 숨가쁜 일상은 아니지만 음산한 밤을 패며 새벽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파수꾼'은 진실만을 추구해야 한다.
어린시절 양치기 소년의 우화를 빗대지 않아도 '파수꾼'의 자질은 진실성에 있다.
'파수꾼'은 예외를 찾아야 하면서 전체를 조망해야 한다.
예측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하여 집중하여 살펴야 하는 한편 전체를 살펴 보는 것이 '파수꾼'의 주요 책무이다.
영화에서 서로 다른 네명의 '파수꾼'이 진실과 그 시절의 가장 중요한 진정성을 지키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파수꾼'의 임무를 실패하고 만다.
#우정이라는 진정함을 지키고자 하지만 방어적 자괴감으로 죽음까지 스스로 몰아 간 기태 ;
주목 받고 각광 받고 싶어함이 어리광을 넘어 폭력과 단절로 안타까운 파국으로 몰아 간다.
#균형과 조율이라는 그럴싸 해보이는 엉거주춤함으로 모두와 단절한 동윤 ;
다소 격하고 힘들더라도 무엇이 진실함이었는지 끝까지 물어 보지 못하고 나중에 후회로 숨어 버린다.
어정쩡함 만큼 위험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한 것이다.
#폭력과 오해라는 외부의 침입으로 부터 도망쳐 버린 희준 ;
피해자처럼 보이지만 결국 아무것도 아니고 외면하고 회피해 버린다.
그 외면과 회피는 물리적인 주먹보다 더 폭력적으로 작용한다.
#마지막으로 모두 잃고 뒤돌아 보기만 하는 답답한 기태의 아버지 ;
아들의 죽음에 대하여 속시원히 이야기해줄 친구도 찿기 힘들고 찿아도 이야기들을 수 없다.
그는 아들의 삶도 죽음도 지키지 못한다.
그렇게도 세 친구와 기태의 아버지는 지켜야 할 것을 지켜내지도 못하고, 진실이라는 새벽도 맞이 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이 무겁고 절망적인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진실을 지키지도 못하였고, 외부로 부터 오는 위험도 막지 못했고, 내가 지키는 전부를 바라 보지도 못한다.
그것이 그들의 성장이라 이야기 하면 궂이 반박하지는 않겠다.
그 성장으로 다음에 더 소중한 것을 지켜 나갈 것이라 이야기 해도 무어라 따지지는 않겠다.
그러기에는 그들은 너무 아팠고, 그들은 너무 외로웠다.
새벽이 오기전에 세상과 제도라는 허술한 파수꾼들이 그들의 진실과 순수를 지켜 내지 못한 것이다.
영화는 고집스럽게도 인물을 close shot 혹은 적어도 medium shot으로 화면을 채워 이야기하고 있다.
아마도 아직 성장기에 있는 세친구들의 어리숙하기 까지한 시선의 표현일 수도 있겠고, 세상의 부조리함으로 부터 그들의 순수함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고도 보인다. (적은 예산으로 진행한 감독의 고육지책이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 보거나, 풍경을 보거나 혹은 여러 사람에게 시선을 두지도 못한다.
그들의 대화는 잡담을 제외하고 다자간의 대화가 힘들다.
너와 나가 주고 받는 문답식의 대화가 전체를 끌고 나간다.
기준잡기 힘들고 전체를 조망하여 사건을 파악하기 힘들다.
그렇다 그들은 아직 어리기때문이다.
파수꾼이 되어 진실함과 순수함을 지켜나가기에는 세상에 대한 지식도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지혜도 문제를 풀 묘안도 부족한 어설픈 파수꾼들이었던 것이다.
감독은 고집스런 angle shot으로 이들의 아직 미숙한 가치관과 위태함을 말하려고 했을런지도 모른다.
세 친구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진실과 순수는 무엇일까?
그것을 돌이켜 보기에 너무 많은 시간을 세상 속에 흘려 보냈다.
세 친구에게 음산하고 침울한 깊은 밤은 절망적이기 까지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새벽은 온다는 것, 그것을 알았더라면 힘들어도 밤을 이겨내고 새벽을 맞이 했을 것이다.
감독은 매체와의 대화에서 '파수꾼'의 제목을 J.D 셀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가져 왔다고 했다.
셀린저의 소설에서 말하는 파수꾼이란 각박한 현실로 부터 소년의 순수와 진실에 대한 진정성을 지켜 주는 표징이었다. 영화 '파수꾼'은 성장영화라는 점에서 또한 진실과 순수에 대한 번민이라는 점에서 소설 <파수꾼>과 상호소통하는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영화의 내용 외의 의미에서도 <파수꾼>의 의미는 중요하다.
아직 서른도 안된 청년감독의 첫 장편이다.
그 첫 장편은 힘겨운 길을 선택한다. 흥행이 되고 이슈가 되는 상업적 장르영화에서 멀찍히 돌아 가버린다.
우리는 이제 영화를 시작하는 재능있는 젊은이의 시작을 주목하고 있다.
마치 영화속 주인공들의 성장 같이 이 젊은 감독의 성장을 우리가 끝까지 지켜 볼 수 있을지... 사실 걱정이 된다.
현실이 꼭 진실은 아니듯, 현재의 영화산업의 구조적 모순이 진리인냥 젊은 예술가를 스스로 무너지게 만들지 않도록 우리는 잘 지켜내야 한다.
그것이 '좋은'('재밌는'과는 의미가 매우 다른) 한국영화를 계속 보고 싶어 하는 <파수꾼>의 역할일 것이다.
이 젊은 감독과 노력한 배우들이, 힘든 밤을 보내고 가슴 두근거리는 새벽을 맞이했으면 한다.
PS : 영화 '파수꾼'의 BEP는 대략 10,000명이라고 들었습니다.. 지금 현재(2011.3.16) 7,100여명.. 아직 안보신 분들 보시고, 보신 분들 한번씩 다시 곱씹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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