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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읽기

4.3 기억일 - 영화 <지슬>, 그리고 끝나지 않은 전쟁

by 박 스테72 2023. 4. 3.
1948년 11월, 제주 섬사람들은 ‘해안선 5km 밖 모든 사람을 폭도로 여긴다’는 흉흉한 소문을 듣고 삼삼오오 모여 피난길에 오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어디서부터 일어나고 있는지 영문도 모른 채 산속으로 피신한 마을 사람들은 곧 돌아갈 생각으로 따뜻한 감자를 나눠 먹으며 장가갈 걱정, 집에 두고 온 돼지 걱정 등 소소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웃음을 잃지 않는데. 이들은 다시 버겁지만, 소소한 일상이 있는 마을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한국 영화에 한국어 자막이 있는 영화가 있다. 바로 2013년 개봉된 영화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 2>이다. 한국 독립영화로 '제주 4.3 희생자' 사건을 다룬 작품으로 통산 14만 이상의 관객을 얻어, <워낭소리>, <울지 마 톤즈>, <똥파리>, 그리고 외화 <원스>를 포함, 독립영화 10만 관객을 달성한 영화로 알려져 있다. 제주 현지인들이 캐스팅되어 제주 방언이 주로 대사로 채워지기에 자막이 필수인 영화가 되었다.

독립영화제 '들꽃영화상' 1회 대상 작 <지슬> 포스터 (출처=자파리 필름)

 

제목인 지슬은 지실(地實)에서 온 말로 감자를 뜻하는 제주도 사투리다. 감독에 따르면 원래 제목은 돼지를 뜻하는 <꿀꿀이>였는데 감자를 의미하는 <지슬>이라고 바뀌었다고 한다. 4·3 사건 당시 토벌대는 주민들을 학살하고 본보기로 보여주려고 시신을 치우지 않았다. 살아남은 주민이 피신해 텅 빈 마을엔 돼지만 남았다. 굶주린 돼지들이 돌담을 허물고 시신을 먹었고, 부쩍 살이 오른 돼지를 토벌대가 잡아먹었다는 게 실제 사건 이어서 제목을 정했다가 영화에선 비유적 연출만 가능해, 제목을 바꾸었다.   


'큰넓궤 학살 사건'의 이야기

영화는 1948년 11월 말부터 1949년 1월 중순까지 큰넓궤(크고 넓은 동굴이라는 뜻의 제주어)에 숨어 지내다 토벌대에 발각되어 희생당한 안덕면 동광리 주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영화다. 5.18 민주화운동이나 기타 현대 한국사의 이야기는 여러 번 영화로 만들어졌지만, 4.3 사건은 인지도가 떨어지는 탓인지 이를 소재로 한 몇 안 되는 영화다. 그 밖의 4.3 사건을 다룬 영화로는 이 영화 말고도 뇌출혈로 별세한 김경률 감독이 감독한 ‘끝나지 않은 세월’도 있는데, 김경률 감독은 이 영화의 프로듀서였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큰넓궤는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산 90번지 일대에 있는 천연 동굴이다. 1948년 11월 군경 토벌대는 동광리 무등이왓 주민들을 집결시키고 주민 10명을 선별해 마을 주민이 보는 앞에서 본보기로 사살을 자행한다. 이에 무등이왓 주민들은 살기 위해 떠돌다가 옆 마을 삼밧구석 주민들과 합류하여 마을 인근의 큰넓궤라는 동굴을 발견해 정착하게 되었다.

어린이와 노인은 주로 동굴에서 지내고 마을 청년들은 마을 경비와 식량 조달을 맡아 생활하다가 1949년 1월 중순 토벌대의 오랜 추적 끝에 동굴이 발각되고 만다. 토벌대는 마을 주민들을 끌어내려 했으나 청년들이 짚과 고추를 태운 연기에 도저히 동굴 진입이 어려워 포기하는 대신에 동굴의 입구를 막아버리고 무등이왓, 삼밧구석 마을을 불태운다.

토벌대가 돌아가자 청년들이 주민들을 한라산 지락으로 안전하게 피신시키고자 합니다. 한라산에 매복해있던 토벌대에 붙잡혀 일부는 현장에서 바로 사살, 나머지는 중문 정방폭포에서 사살 후, 수장되었다. 이들 120여 명의 주민들이 살던 무등이왓, 삼밧구석 마을은 4.3 후에도 복구되지 않아 지금까지 '잃어버린 마을'로 남아있다. 그래서, 영화는 ‘신위(神位)’ ‘신묘(神廟)’ ‘음복(飮福)’ ‘소지(燒紙)’라는 제사 용어로 단락을 구분해 하나의 제사처럼 진행한다. 하나의 커다란 '제례 의식'같은 느낌을 받는다.

   
스틸컷 출처=영화사 자파리 필름, 자료사진=donga.com



끝나지 않은 세월, 끝나지 않는 전쟁

영화 개봉 시 온라인 안팎으로 논쟁이 제법 뜨거웠다. 소위 '별점 테러'의 이슈가 점화된 논쟁이다. 특정 사이트 사용자들이 영화 내용과 실제 역사를 왜곡하는 댓글을 남기고 별점 테러를 하여 네이버 영화 평점란이 왜곡되었다.

영화에선 남로당 미화는 없는데도 남로당 미화한다고 거짓 선동을 하고, 일부는 영화에 나오지 않는 남로당을 묘사하여 비판한다. 그리고 많아 봐야 최대 500명 선을 넘지 않는 작은 규모였던 무장대를 진압하기 위해 제주도민 1~2만 명을 죽인 초토화 작전을 빨치산 토벌이라 왜곡한다. 양민 학살을 남로당 탓으로 몰기도 하며 일부는 당시 빨갱이 토벌을 위해선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는 피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테러를 받은 영화의 관계자들은 네이버에 항의하였고, 이에 네이버는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별점란을 리뉴얼할 계획을 하고 있다고 말만 되풀이했다. 아직도 별점 그대로다. 타 포털과 비교가 되는 지점이다.

네이버와 다음 영화 평점 비교 (캡쳐본)

별점 테러의 일종 (출처=네이버 영화)

 

역사적 사건은 2007년이 되어서야 진실의 규명과 피해자들의 복권을 위한 특별법으로 새로 세워지고 있지만, 아직 '인식의 부조리'와 '확증 편향'은 더 거세진 듯하다. 작년 4·3 때에 대기업 재벌 3세는 '멸공' 드립하고, 청년 이대남들은 열광했다. 아직 5.18에 대해서도 남파 공작설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며, 소녀상 앞에 모여든 청년들은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된 것은 일본과 미국 덕'이라고 외쳤다. 이 나라 대통령은 과거는 지나간 것이라고 하며 확연치 않은 ‘미래’만 강조한다.

그 잔인한 세월은 여미어 지지 않았고, 아직도 세상은 둘로 나뉘어 전쟁 중이다.
   


이제는 '피아식별(彼我識別)'이 필요한 때

대한민국의 역사 교육은 낙제점에 가깝다. 교육 선진국의 경우, 고대ㆍ중세의 역사를 간추리고 대신 근현대사를 심도 있게 가르친다. 한국은 고대사에 병적으로 집착한다. 한반도 주인과 정권의 당위성을 강조하던 '정체성'의 적자의 논리가 필요했던 시기의 유산이라 보아도 무방해 보인다.

 
미국은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유럽에서 독일을 점령하는 등 위세를 과시한 데 이어 극동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심히 우려하고 있었다. 미국의 이런 조바심은 태평양전쟁 종전 이후 미군이 일본을 우군으로 만들기 위해 전범 처리 등을 약하게 하는 방식으로 노력했고, 남한에 점령군으로 진주해 친일 청산을 차단하면서 친사회주의 세력을 약화하는 노력을 강화한 것에서 확인된다. 즉 소련의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크게 의식해 일본에 대한 원폭 투하를 결정했다는 추정이 가장 큰 힘을 얻고 있다. 미국은 소련이 만주를 더 많이 점령할 기회를 차단하기 위해 종전을 서둘렀다는 것이다. 

-<통일일보> 칼럼 본문 중-

만약,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 분단되었으면 어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포츠담 회담으로 분단 통치가 결정되었지만, 사실 최초에는 패전국 일본을 분단하려던 계획이 있었다. 독일을 보면 당연 예상할 수 있는 일다. 그러나, 소련이 일본 점령에 대하여 선전 포고하자, 미국은 소련의 기세를 방어하기 위해, 핵폭탄 투하라는 극단적 방법을 통해 끝까지 버티던 일본의 항복을 받는다. 유럽에서의 소련의 승전과 기세가 드세었고, 상대적으로 아시아의 공산화는 차순위로 진행되었기에, 엉뚱한 한반도가 두 동강이 나 버렸다.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라 평가될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스스로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지을 권리를 행사하지 못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제주 4.3'의 이야기도 그 연장선에 있는 상징적인 사건이자 역사다. 일본의 전략적 요충지로 인식되어 미군정은 제주도에 일시 소개령을 내리고, 6만이 넘는 인구들이 강제 소개되었다가 다시 돌아오는 과정에서 역사적 비극은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나가사키 원폭, 포츠담 회담 (출처=dbanews.com)

제주라는 섬(島), '폭삭 속았수다'

제주의 행정 공식 명칭은 제주특별자치도(濟州特別自治道)로 줄여서 제주도(濟州道)로 불린다. 그런데 또 다른 '제주도(島)는 말 그대로 '섬'이다. 교통수단과 교역이 발달하지 않는 한 고립된 곳이다. 그 고립의 흔적은 언뜻 알아듣지 못하는 그들의 방언에 담겨 있다. 그리고 제주는 예전부터 항상 부족함으로 힘들어하는 섬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배가 고팠고, 부지런히 절약하며 살아도 가난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제주 사람들은 예전부터 섬을 떠나고 싶어 했고, 기회가 된다면 육지로 육지로 향하였다.

그러나, 제주는 헬조선 청년들의 이어도가 될 수도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여전히 지키고 싶다. 지역의 시간과 사람을 담아낸 오름처럼 그리고 이 나라 젊은이들의 바람을 담은 바람처럼 소망과 꿈 실현의 그곳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제주는 늘 옳다.

제주는 제게 늘 깨우침을 주는 피난처였다. 천주교의 심신 수양 중 하나인 '피정(避靜, retreat)'하는 장소였다. 피정은 피세정념(避世靜念) 또는 피속추정(避俗追靜)의 준말로 일상을 벗어나, 고요함 속에서 영성과 묵상으로 자신을 정화, 수련하는 일이다. 그만큼 이 제주라는 섬은 제게 '고요의 땅'이었다. 그러나, 제주를 알아가고 더듬어 보면서, 그 고요함 속에 처절한 생존의 분투가 있었음을 알아 갔다. 제주민들이 초창기에 늘 하던 '육지 것들'이라는 말이 괜한 투정이 아니었음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4.3 기억일 캘리그라피, 제주의 오름 (사진 출처=김영갑 갤러리) ⓒ김영갑

오늘은 4월 3일, 제주 4·3 희생자 추념일이다. 이날을 '제주 4.3 기억일'로 부르길 희망한다. 맞서 싸울 수도 없었던 민중에게 '항쟁'은 그 버거움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기억하고 공부하고 학습되길 바라는 마음이 가득하다. 휴양지로 제2의 인생 가꾸기로 찾아드는 '제주'의 눈물을 기억하길 바란다. 학습도 없는 잘못된 편향으로 스스로 갈라치지 않고, 언젠가 섬이지만 고립되지 않은 우리의 소중한 역사의 땅으로 서로 기대어 살기를 희망한다.

 

'제주! 폭삭 속았수다!'
 


끝으로 영화 <지슬>을 만든 오멸 감독의 인터뷰를 곁들여 본다.

 
"젊은 분들이 제주를 잘 모르는 건 못 배웠기 때문이에요. 가르침이 없었거나 무관심인 거죠. 우리가 친구네 집에 가더라도 그 집에 누가 어떻게 사는지 어느 정도는 알잖아요. 제주에 있는 사람 입장에선 아쉽죠. 제주섬은 그동안 죄지은 사람이 가는 유배지, 4·3이 일어난 살육의 섬, 관광 휴양지, 그리고 지금은 해군기지로 대표되고 있잖아요.

제주에선 '육지 것들'이란 표현이 있어요. 육지 사람들이 제주를 자기 편한 대로 쓰고 있다는 반발이 담겨 있죠. 제주에 와서 관광자의 눈으로 봐요. 마을 사람들 집을 함부로 기웃거리기도 하면서요.

이젠 좀 여행자의 눈으로 봤으면 좋겠어요. 여행자는 가는 곳의 역사와 문화를 성찰하려는 사람입니다. 관광은 그저 돈을 쓰자는 행동이고요. 관광객을 위해 제주엔 큰 도로가 엄청 많이 생겼어요. 어떤 마을은 구멍가게를 가기 위해 사람이 목숨을 걸고 차도를 건너야 하는 곳도 있어요.

제주를 보호해야 한다고 하지만 말 뿐이에요. 해군기지가 들어서고 전쟁이 나면 가장 먼저 박살 나는 게 이곳이지 않을까요? 제주 사람은 아무런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불쾌하죠. 제주가 국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의 휴식을 위해 존재하는 섬이 아니잖아요."

-오멸 감독-
 

https://youtu.be/IEX8xORH1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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