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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읽기

만우절(萬愚節), 비둘기, 그리고 마흔살 (2012. 4. 1)

by 박 스테72 2015. 9. 7.

“사람은 어려서부터 악한 마음을 품게 마련,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창세기 8.21


 

1.


 

방황을 넘어 선, 온갖 악한 인간 모습에 하느님의 노여움은 끝을 헤아리기 어려운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 망가진 세상을 큰 홍수로 깨끗이 쓸어 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노라 결심한 하느님은 노아에게 큰 방주를 만들도록 하십니다. 세상의 온갖 짐승의 암수 한 쌍씩과 나무와 꽃과 풀의 어린 싹과 씨앗을 배에 싣도록 하시고는, 40일 동안 어마 어마한 큰 비를 쏟아 부으십니다. 이세 상은 그렇게 큰 물에 잠겨 버리고 말았습니다. 작년에 개봉한 ‘2012’라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 묘사된 쓰나미를 떠 올리자면, 하늘의 노여움은 그렇게 커다랗고 좀처럼 누르기 힘든 것이었나 봅니다.


 


그렇게 40일 동안 퍼 부은 큰 비로 인해, 이 세상은 한 발 내 디딜 한 뼘의 땅조차 없이 모두 물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물은 빠지게 되고, 어디엔가 뭍이 드러나기를 기대하면서 노아는 드러난 땅을 찾으려 합니다. 처음에 까마귀를 창 밖으로 날려 보냈으나, 까마귀는 뭍이 완전히 드러날 때까지 물위를 날아 다니며 다시는 방주로 돌아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노아는 비둘기를 날려 보냅니다. 비둘기는 하루 이틀 지나고 떠나던 그 모습으로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 오게 됩니다. 노아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비둘기를 날려 보냅니다. 그 때 다시 돌아 온 비둘기는 감로나뭇잎을 물로 돌아 오게 됩니다. 어디엔가 땅이 드러나고, 그 땅 위에서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발걸음을 내 딛는 인류에게 하느님께서는 약속을 하십니다. 인간의 천성이란 악한 마음을 품게 끔 되어 있는 것, 하지만 이 세상은 인간만이 사는 세상이 아니라, 세상의 온갖 동물과 풀과 나무와 꽃들, 그리고 그들에게 생명의 기운을 주는 흙과 물이 함께 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이렇게 살아 갈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이 땅과 이 자연 덕택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2.


초등학생 아들도 잘 아는 성경 속의 ‘노아의 방주’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 나온 비둘기가 저에게는 조금 더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노아가 땅을 확인하기 위해 까마귀 이후에 비둘기를 처음 날려 보낸 날이 바로 4월 1일이라는 기원설 때문입니다. 헛수고가 될 것임에도 분명한 것에 심부름을 보내는 일, 그리고 그 심부름을 묵묵히 해내는 비둘기의 모습이 바보 같다고 하여, 결국 4월 1일은 만우절(萬愚節: April pool’s Day)이 되었다는 수많은 만우절의 기원 중 하나인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이 그 날, 만우절이고, 오늘이 바로 제 귀 빠진 날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3.


오늘로 이 세상에 살아 온지 꽉 채워 40년이 되었습니다. 나이 마흔을 맞이 하면서 생각이 많아 졌습니다. 어느 선배님께서 마흔이라는 나이를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이 낯설어 보여 힘겨운'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스무 살의 낭만’을 건너 뛰었고, 현실감에 쫓기어 ‘서른 즈음에’ 느낄 감성을 충분히 느낄 수 없었기에 제게는 마흔이란 나이가 더 아릿한 모습으로 다가 서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노아가 보낸 비둘기는 어쩌면 진짜 바보였을지도 모릅니다. 물에 잠긴 세상이 언제 모습을 드러낼지 확신도 없이, 노아의 바람을 담아 깊은 물위를 이리 저리 날아 다니다가, 지친 모습으로 다시 날아 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고 나서 다시 확신할 수 없는 비행을 주저 없이 나서게 됩니다. 비둘기의 모습을 복잡하고 미묘한 사람의 인생사에 비교하기에 무리가 있을 수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비둘기는 적어도 노아의 부름에 한번도 흔들림 없이 응답하였다는 것입니다. 바로 어떠한 주변의 환경에도 혹하지 않는 ‘불혹(不惑)’의 모습이었습니다.


 


4.


저는 불혹(不惑)마흔 살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저는, '삶'이라는 거대한 자연의 섭리에 '인생'이라 감히 줄그어 그래프 그려보고, 그것도 모자라 부여 잡지도 못할 시간과 생각들을 조각 조각 쪼개어 '생활'이라고 버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여전히 세상의 기준에 맞추어 볼 욕심을 가득 쥔 채 내려 놓지 못하고 이리 저리 선회하며 방황하는 까마귀와 같은 모습인 것 같습니다.


 


그래선 안되겠구나 싶고, 맘이 그렇고, 몸이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작은 반항감으로 시작된 나의 새로운 발걸음이, 어떠한 욕심에도 흔들리지 않는 뚜벅이의 모습으로 잘 지켜 나갔으면 합니다. 저도 다시는 몇 몇 사람 때문에 이 세상을 저주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며 살고 싶습니다.


 


나에게 솔직하고 시간에게 공손하고 오늘에게 감사해 하는 그런 마흔살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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