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히는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사회 사상가이자 가톨릭 성직자이다. 로마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잘프부르크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에 미국으로 건너가 가톨릭 사제로 활동했으며, 『학교 없는 사회』나 『창조적인 실업』과 같은 수많은 저작을 출간했다. 그는 다양한 분야에 걸친 풍부한 교양을 바탕으로 현대 문명의 문제점들을 예리하게 비판했다. 1960년 일련의 교회 정책에 반대하며 가톨릭 사제직에서 물러난 뒤에 멕시코의 쿠에르나바카에 를 설립하여 산업 사회에 대한 비판적 분석에 몰두했다.
그는 『공생을 위한 도구』라는 책에서 인간의 자율적인 행위가 서로 교환되는 공생의 사회를 주창했다. 인간이 공생적인 삶을 살 수 있으려면 사회 구성원들이 저마다 최소한의 통제를 받는 도구를 사용하여 가장 자율적인 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는 저작과 사회 활동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을 딴 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수확 체감의 법칙이라는 고전 경제학의 법칙이 인간의 행위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에 주목한 최초의 학자였다. 일리히의 법칙은 이렇게 나타낼 수 있다. 초기의 경제학자들이 말한 것처럼, 농업 노동의 양을 배로 늘린다고 해서 밀의 생산량이 배로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노동의 양을 늘리는 만큼 생산량이 증가하지만, 어떤 한계를 넘어서면 노동의 양을 늘려도 생산량이 증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법칙은 기업의 차원뿐만 아니라 개인의 차원에도 적용된다. 1960년대까지 스타하노프 운동의 지지자들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 노동자에 대한 압력을 증가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압력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노동의 효율이 높아지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압력은 어느 정도까지만 효과가 있다. 그 한계를 넘어서면 추가적인 스트레스는 역효과나 파괴적인 효과를 낸다.
[출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지속적인 노동강도 압박의 매니지먼트는 결국 비효율 뿐 아니라, 조직의 붕괴도 만들어 낸다.
그런데 대부분의 매니지먼트 책임자들은 고용인들의 노동강도의 임계치가 어디인지 궁금해 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경영자의 '직무유기' 중 가장 위험한 요소이다.
뾰로롱 방망이가 있다면, 이러한 기본 중의 기본을 각성하는데 사용하였으면 좋겠다.
-박군 생각-
'세상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X세대이다. (0) | 2015.09.06 |
---|---|
마뜨로슈까 (2011) (0) | 2015.09.06 |
슈퍼 히어로의 서바이벌 (2011) (0) | 2015.09.06 |
협동, 상호성, 용서 (2011) (0) | 2015.09.06 |
[영화로 세상읽기 : 복수는 나의것, 올드보이, 달콤한인생, 악마를 보았다] 복수는 누구의 것인가? : ‘복수극의 플롯’으로 영화 말하기 (0) | 2015.09.0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