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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읽기

[영화리뷰 : 피에타 (2012)] 우리는 불쌍하다

by 박 스테72 2015. 9. 6.

 


피에타 (2012)

Pieta 
8.6
감독
김기덕
출연
조민수, 이정진, 우기홍, 강은진, 조재룡
정보
드라마 | 한국 | 104 분 | 2012-09-06
글쓴이 평점  

 

 

키리에 엘레이손> 불쌍한 사람들 ? 폭력, 외로움, 그리고 구원

 

매일 홀로 아침을 맞이하는 남자 ‘강도’는 고리 채무자에게 신체 상해를 입혀 보험금으로 돈을 받아 내는 해결사이다. 그렇게 폭력으로 숨쉬며 살아 온 그에게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버린 ‘엄마’라는 여자가 찾아 온다. 여자의 정체에 대해 경계를 하면서도, 그녀가 갑자기 사라질까 두려운 남자는 점차 엄마에게 빠져 든다. 엄마의 등장으로 인해 강도는 삶과 생각의 변화를 갖게 되고, 엄마는 여전히 알 수 없는 과거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 엄청난 비밀을 가진 채 만난 엄마라는 여자와 외로운 해결사, 그들은 폭력과 구원의 굴레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것일까? 영화 제목 피에타 처럼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비일까?

 

 

 

자비를 베푸소서

‘피에타’라는 이탈리아어는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말에서 기인한다. 유명화가들의 피에타 소조와 회화들 안에 ‘피에타’는 십자가에서 인간으로서의 생을 다한 숨을 거둔 예수를 끌어 안은 성모 마리아의 모습으로 대표된다. 이렇듯 ‘피에타’라는 말은 예수의 죽음을 애도하며 긍휼(불쌍히 여김)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고유적인 명사처럼 되어 버렸다. 이 지점에서 영화와 연관하여 드는 생각이 있다. 과연 자비의 베풂을 받고 불쌍히 여기어야 되는 것은 누구인가? 하는 물음이다. 죽은 예수인가? 아니면 예수를 죽인 빌라도와 바리사이파 사람들, 제사장들인가? 그것도 아니면 예수를 죽임으로써 2천 년 동안 죄악과 구원에 쳇바퀴 속에서 번민하는 나약한 인간들인가 하는 물음이다.

 

영화 속에서 이해하기 힘든 고리(원금의 10배가 되는 이자부담)로 고통을 받고, 채무를 상환하지 못하면 신체를 훼손하여 보험금으로 변제해야 하는 청계천 변의 소공인들은 분명 불쌍하다. 그런 사람의 처지와 함께 하며 때로는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아내라는 이름으로 그의 불행을 함께 하는 이들도 애처롭다. 그 뿐 아니라 폭력으로 일상을 채워가는 ‘강도’ 역시 이세상에 홀로 버틸 수 밖에 없는 불쌍한 사람이다. 이렇듯 영화 ‘피에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연민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다. ‘강도’의 원초적인 결핍인 외로움을 이용하여 파국으로 이끄는 가짜 엄마 역시 처지를 이해하기 쉬운 인물이다. 그렇다면, 폭력과 그 폭력의 증거만 가득한 이세상에서 우리는 누구에게 그 죄의 원인을 묻고 따져야 하는 것일까? 아마도 영화에서 강도와 엄마라 주장하는 여인의 대화에서 답변해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돈은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지,,,, 사랑, 죽음, 복수……”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불쌍하다’는 것은 처지가 불쌍하다는 물질적 결핍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원죄의 속박에서 벗어 날 수 없는 인간의 탐욕적 본성에 대한 구원의 시그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쩌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가혹한 것은 외롭게 놓아 두는 것이다. 외로움을 주는 것은 가장 처절한 폭력이기도 한 이유이다. 현대사회에서 그 외로움의 시작과 끝은 결국 ‘돈’이라는 재화자본에 기인하고 있다고 감독은 말하고 있다. 돈이 문제이고, 돈이 모든 것인 이세상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은 모호하기만 하다. 돈을 빌려 쓸 수 밖에 없는 청계천 변 재개발 예정지의 노동자는 분명 이 세상 자본주의 구조에서의 피해자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루를 연명하거나 빚을 갚아내는 돈다발이 아니라, 본인들의 처지를 공감해 줄 관심이었을지도 모른다. 돈이라는 재화의 많고 적음이 그들을 두렵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돈 때문에 닥쳐올 외로움이 두려웠을지 모른다.

영화 속에서 ‘강도’에게 부러 접근한 여자는 엄마의 모성을 드러 내기 위해 노래를 부른다. 그 노래에 ‘강도’는 바로 반응하고 변화를 시작한다. 바로 외로움을 치유해 주는 엄마의 자장가가 그 노래였던 것이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이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들려주는 자장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륵 잠이 듭니다.

 

키리에(Kyrie) ?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시 예수와 마리아의 ‘피에타’를 들여 다 보면, 마리아의 눈물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면서 예수를 죽게 만든 세상에 대한 연민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해하기 힘든 폭력과 죄악에 있어서 한 사람의 행위로 판단하기에는 세상을 둘러 싼 관념과 생각과 조건이라는 것들이 편해 보이지 않는 이유이다. 영화 마지막에 다소 극단적인 ‘구원’을 위해 ‘강도’가 행하는 속죄의 핏빛 길 위에 그레고리안 미사곡인 ‘키리에’가 깔려 온다. 그렇다. 영화 속의 폭력의 피해자와 가해자, 그리고 영화 밖의 우리들 모두는 불쌍한 사람들인 것이다.

 

대한민국은 OECD국가 중 자살율 1위의 국가이며, 학교폭력이 증가해도 대책을 세울 수 없는 사회이고, 어제 오늘이 아닌 성폭행 및 폭력행위에 대해 이렇다 할 방법을 제시 못하는 사회이다. 폭력은 어떠한 이유로도 합당함을 인정받을 수 없다. 하지만, 단지 그렇게 생각하여 궁형으로 사후의 처벌만 논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너무나도 많다. 자살을 생각하는 수 많은 위기의 사람들이나, 폭력을 상습적으로 주는 사람들, 그리고 그 폭력을 일상처럼 받고 사는 사람들, 그들 모두가 언제나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일 수 없다. ‘나만 아니면 돼.’ 라는 식의 무모한 일반화와 타인화, 그리고 ‘왜’라는 이유보다 ‘어떻게’가 중요한 우리들의 결과주의적 사고방식이 더욱 폭력적일지 모른다. 그래서 이세상의 보편적 가치처럼 둔갑한 천한 자본적 가치에 순응하는 우리모두가 죄인일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불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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